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에스겔 1:1~3)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나라는 사방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부모는 두려움 속에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에스겔, 그 이름 안에는 부모의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살아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강하게 붙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고향 땅이 아닌 낯선 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제국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붙들었던 이름과 약속이, 눈앞의 현실과 정반대로 뒤집혀 버리는 순간 말입니다.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진단서를 받아 드는 순간, 형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무너지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에스겔서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에스겔이 서 있던 곳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였습니다.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서 물을 끌어와 니푸르 지역으로 흐르게 한 인공 수로였습니다.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이곳으로 끌려왔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신명기는 이미 오래전에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언약을 배반하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려가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연한 국제정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데 대한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계속 어기는데도 부모가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일까요, 무관심일까요? 진짜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반드시 개입합니다. 회초리를 들든, 눈물로 호소하든, 무언가 반응이 있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없이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그 관계가 끝났다는 신호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이 백성을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언약이 여전히 살아 유효했기에, 언약의 저주도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만약 계속된 배반에도 아무런 징계가 없었다면, 그것은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징계를 통해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며 드린 기도에도 이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인생이 없기에, 적국에 넘겨진 백성이라도 그곳에서 죄를 깨닫고 돌이켜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기도였습니다. 애굽의 철 풀무에서 건져내신 그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7편은 그 시절 포로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사람들, 사로잡아 온 자들이 조롱하듯 노래를 청할 때,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자기 오른손이, 자기 혀가 그 기능을 잃어도 좋다고 맹세할 만큼, 그들의 상실감은 깊었습니다.
어느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평생 일구어 온 사업을 하루아침에 잃고, 살던 집마저 정리해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부를 노래가 없습니다. 감사하다고 노래할 수도 없고, 원망하자니 그것도 못하겠고, 그냥 강가에 앉아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아무 노래도 부를 수 없던 그 침묵의 자리에서, 그분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에스겔이 있던 자리도 바로 그런 자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아 강가로 나갔던 것처럼, 포로들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기도하기 위해 강가에 모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무력한 자리, 더 이상 부를 노래가 없는 그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째 되던 그날,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에스겔에게 보였고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이방 땅 바벨론의 강가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바벨론조차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도구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가장 크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포로 됨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변 이방 나라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린 죄의 결과였습니다.
둘째, 심판을 통해 이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됩니다. 스스로 되뇌던 말처럼,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라는 절망이었습니다.
셋째,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홀로 일하십니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처럼, 포로에서의 회복은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도, 포로 된 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 외에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키신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의 이름을 아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뿌리를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은 우리의 선함이나 노력의 대가가 아닙니다. 마치 부도난 회사를 다시 세우는 것이 그 회사의 실적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은행장이 자신의 신용과 이름을 걸고 다시 투자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은혜로 이루신 일입니다. 여기에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감사할 것만 남습니다.
이 "하늘이 열림"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신약에서는 세 번 더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는 야곱이 보았던 하늘 사닥다리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순간이 인간에게는 절망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치던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그 밤에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된 그발 강가에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던 그 순간에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다다랐다고 모든 사람에게 하늘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만 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삶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장 캄캄한 그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하늘이 열리는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늘이 열릴 때 보이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성도는 이 땅에 영원한 처소가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 날마다 이 땅으로부터 조금씩 분리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때, 마치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사람들처럼 탄식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이 열립니다.
지금 그발 강가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있다면, 더 이상 부를 노래가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계신 분이 있다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자리는 끝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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