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겔 2장 1~10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몇 해 전, 어느 노(老) 목사님이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설교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강단 뒤에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특별한 질병은 없었습니다. 다만 평생 짊어졌던 말씀의 무게,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꼈던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 마침내 그 노구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곁에 있던 사모님이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회를 은혜로운 일, 존경받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든 사람은 그 자리는 결코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그발 강가, 포로 된 자들 사이에서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광채는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걸린 무지개와 같았다고 그는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본 순간, 에스겔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벌떡 일어나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대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는 임금의 행차만 지나가도 백성들은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 왕 앞에서도 사람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이의 영광 앞에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란 결국 무엇입니까?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광 앞에 서면, 그 교만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요한계시록의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전에 주님 품에 기대어 앉았던 그 요한조차,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는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은혜로운 친밀함을 누렸던 자라 할지라도, 영광의 자리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스겔이 자기 힘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스스로는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힘겨워하셨는데, 가족들이 찾아와 손을 잡고 기도하며 부축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잠시나마 몸을 일으켜 앉으실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힘이 아니라 곁에서 붙잡아주는 손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준비되어서, 스스로 자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친히 이루어 가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십니다. 히브리어로 벤 아담, 곧 '아담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서 전체에서 이 표현은 무려 아흔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결코 위엄 있는 칭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흙으로 지음 받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묘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방금까지 영광의 형상 앞에 엎드러져 있던 그 연약한 자에게, 이제 하나님은 사명을 맡기십니다. 마치 폭풍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어부에게 다시 배의 키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일관된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세워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이 연약한 인자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도 스스로를 즐겨 '인자'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신 분이 연약한 인자의 몸을 입고 오셔서, 패역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의 소명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사명의 대상은 참으로 무겁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언약 백성이면서도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배반해 온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리 못을 박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것이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사명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마치 상급자가 부하 직원에게 "이 보고서를 올려도 결재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올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5절이 답을 줍니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심판의 날에 그들이 "우리는 몰랐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없도록, 미리 경고의 증인을 세워두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던 부자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언하면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앞으로 닥칠 고난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네가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저항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참 선지자의 메시지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패역한 백성들은 선견자들에게 "선견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은 본래 진실보다 위로를, 책망보다 축복을 더 원합니다. 마치 건강검진 결과를 듣기 싫어하는 환자가 의사에게 "그냥 괜찮다고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사는 병이 있으면 병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환자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번영과 축복만을 남발하는 강단이 많습니다. 그런 시대에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가시와 찔레와 전갈 같은 반발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순간, 말씀은 왜곡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인상 깊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서 두루마리 책을 에스겔 앞에 펼치시는데, 그 안팎에 기록된 것은 오직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존재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여, 자기 살과 피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랜 세월 한 가지 악기를 연습한 연주자가 어느 순간 악보를 보지 않고도 몸이 먼저 음악을 알아채는 것처럼, 말씀을 삼킨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슬픔과 애곡과 재앙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슬픈 소식을 먼저 먹이십니까? 그것은 진정한 위로가 값싼 위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직면하지 않은 위로는 상처를 덮어놓은 반창고에 불과합니다. 진짜 치유는 먼저 아픔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을 가시와 찔레와 전갈처럼 대했던 그 패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시와 찔레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에서, 재앙의 두루마리는 은혜의 복음으로 바뀝니다. 애가와 애곡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삼켰던 그 선지자적 사명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전하는 말씀도 결국 하나요, 그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온 세상과 우주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에스겔의 소명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성공이 보장된 사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결과를 계산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부모,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는 성도, 낙심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반드시 들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명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에스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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