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브리서 3:12~13)
히브리서 3장은 우리에게 낯설고도 익숙한 경고를 던집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죄 짓지 마라, 율법 잘 지켜라라는 식의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의 우월성, 그리스도의 피, 율법을 넘어서는 복음의 영광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3장에서 “죄 짓지 말라, 안식에 못 들어간다”라고 말할 리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3장은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며, 그 죄가 사람을 어떻게 완고하게 만들며, 결국 믿지 못함으로 하나님과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는 다 지옥 간 건가?" 성경을 인본주의적 시각으로 읽기 시작하면 반드시 “누가 착했고 누가 못했는가, 누가 천국 갔고 누가 지옥 갔는가”라는 도덕 평가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 단순한 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기능적 배우입니다.
그들은 ‘기능적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인류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세우신 거울입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표징이자 예표입니다. 그렇기에 광야에서 죽은 이들이 모두 지옥 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광야에서 죽은 모세는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납니다. 반대로 광야에서 반역했던 고라 무리는 유다서가 지옥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지옥, 누가 천국은 우리의 판단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과 맺으신 언약과 신실함으로 판단하십니다. 히브리서의 초점은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지옥 갔다”가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 “너희는 그 본질로 되돌아가지 말라.” 여기에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지 않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3장이 규명하는 죄는 도덕적 실수나 윤리적 범죄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성입니다.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한다.”(10절)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12절)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됨.”(13절) “순종하지 않음은 믿지 않음 때문.”(19절)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중심성(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근본 성향입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 사건의 반복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불평, 원망, 금송아지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질 것이라”는 약속을 버리고 자기 판단을 기준으로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즉, 현실이 기준이고 약속은 부차적입니다. 자기 판단이 주인이고 하나님은 수단입니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확보하고, 하나님은 보험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성숙’을 사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 하면 곧잘 “나는 얼마나 변했는가?”, “얼마나 성숙했는가?”, “어떤 인격이 개발되었는가?” 이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조차 치매가 오자 “이년아, 아직도 예수 믿냐?”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품과 성숙이 사라졌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그의 육신과 정신의 기능이 무너졌을 뿐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인격의 완성’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입니다. 우리가 붙들린 것은 ‘내 인품’, ‘내 의지’, ‘내 성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언약, 성령의 간섭입니다. 광야를 지나가던 그 세대 중 누군가는 착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잔인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온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도덕적 스펙트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는 인격이 뛰어난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니라, 약속을 믿은 두 사람인 것입니다. 인격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성숙이 아니라 붙드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적 율법주의에 머물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마라.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의 전부다.” 본문은 ‘죄 짓지 말라’는 수준이 아니라, 죄의 본질인 불신을 경고합니다. 약속보다 현실을 더 크게 보는 마음, 하나님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마음, 아들의 피보다 내 의로움, 내 성숙, 내 열심을 더 의지하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완고하게 만들었던 마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즉, “오늘, 다시 아들의 피를 바라보라.” 이것이 본문의 유일한 요구입니다.
성도의 삶은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드러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쓰임 받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내가 점점 위대해지고, 착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가 흥하는 삶, 내 의는 사라지고 그의 피가 뚜렷해지는 삶, 세례 요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가 성경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 삶에 나타나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내 인격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이 더 자주 드러나는 것입니다.
광야 세대를 보며 우리는 묻습니다. “왜 그들은 약속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히브리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니라.” 그들의 문제는 도덕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현실을 기준으로 약속을 버리려 하지 않는가?”, “아들의 피보다 자신의 성숙을 더 믿으려 하지 않는가?” 오늘,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의 음성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아들의 십자가가 모든 것을 완성했습니다. 믿음은 그것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안식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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