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이사야 1:3)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 한 늙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문 앞에 섰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구원의 노래가 아니라 고발장이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재판정에 서서 증인을 부를 때, 우리는 그 사건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증인석에 세웁니다. 왜 하필 하늘과 땅이었을까요? 그것은 아주 오래전,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이미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 1절,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모세와 이사야 사이에는 무려 60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600년 전에 예언되었던 그 내용이 이사야의 시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걸어놓은 저주와도 같은 예언이,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사야 1장 2절의 말씀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쏟아내는 탄식과도 같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의 무게를 압니다. 밤을 새워가며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자식이 커서 부모를 몰라보고 등을 돌릴 때, 그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책망하십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시골 마당에서 소를 키워본 사람들은 압니다. 덩치가 산만 한 소라도, 주인집 어린아이가 고삐를 잡고 끌면 순순히 따라갑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소는 자기 주인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책망을 합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원대학원 교수가 갈매기 알을 인공으로 부화시켜 새끼 갈매기를 키웠습니다. 그 갈매기는 자라서 다른 갈매기 무리와 함께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살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교수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무리에서 벗어나 그에게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미물인 새조차도 자신을 길러준 은인의 음성을 기억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손에 지음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이스라엘이 그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고발하는 유다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버린 무신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전에서 제물을 무수히 바치고,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를 성실히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왜 이런 반응을 보이실까요? 문제는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이랬습니다. '내가 이만큼 제물을 바치고, 이만큼 절기를 지켰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가 쌓은 공로만큼 대가를 요구하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종교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사사기 17장에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은 천 개를 훔쳤다가 어머니의 저주를 듣고 겁이 나서 다시 내어놓습니다. 어머니는 그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아들 중 하나에게 에봇을 입혀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이 레위 소년 하나가 그 집에 이르자, 레위 지파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사장으로 삼고 연봉으로 은 열 개와 옷 한 벌과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미가는 이렇게 흡족해합니다. "이제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실 줄을 아노라."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신앙입니까? 제사장 하나 세워 놓고 하나님을 자기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여기는 태도, 이것이 바로 이사야 시대 유다 백성들이 제물을 드리며 가졌던 마음과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주일예배 참석하고, 십일조 드리고, 봉사 좀 했다고 해서 마음속으로 '이 정도면 됐지' 하며 하나님을 향한 채무를 다 갚은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7절과 8절은 그 결과를 냉혹하게 보여줍니다. 땅은 황무해지고, 성읍은 불에 타고, 토지는 이방인의 손에 삼켜졌습니다. 얼마나 처참했던지 남은 것이라고는 포도원의 망대, 원두밭의 상직막처럼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 은혜로 조금이나마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5절과 6절의 묘사입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맞았습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만큼 심하게 매를 맞았는데도, 백성들은 여전히 주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매와도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이유는 미워서가 아니라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그 매를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같은 길로 가려는 자식이 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답은 신명기 8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에서 20절은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신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을 가장 큰 위험으로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이 잘나서도, 수가 많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의 약속을 따라 어린 양의 희생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의미를 잊어버린 제사는 결국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결한 짐승을 끌고 와서 그 목을 치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 짐승을 누가 잡습니까? 제물을 가져온 그 사람이 직접 잡습니다. 죽음 앞에서 발버둥 치는 짐승을 붙들고 목을 치노라면, 그 피가 자신의 몸에 튀고 손에 묻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뒤집어쓴 채 돌아가면서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여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나 대신 이 죄 없는 짐승이 죽었구나.' 이것이 제사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빠진 채 드리는 제사는 아무리 화려하고 규모가 커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립니다.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에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하는 계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제사를 주님께서 받지 않으셨듯이, 오늘 우리의 예배도 그 형식만 남고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가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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