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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죽기 위해 태어난 다윗의 혈통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습니다. 이 한 구절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족보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가장 깊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많은 이들이 “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오신 이유”를 그분이 왕의 자손, 곧 하늘의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이 사실을 전합니다.

성경에서 “
혈통”이라는 단어는 인간적, 세속적, 그리고 죽어야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굳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표현합니다. 그 혈통은 높임이 아니라 죽음의 운명, 곧 죄의 역사 속에 태어난 인간 세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혈통 안으로 오셨습니다. 왕의 자손으로, 그러나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오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왕이 인간의 왕조 안으로 들어오심은 인간의 왕됨, 인간의 영광, 인간의 나라가 결국 죽어야 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의 왕조는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동시에 타락과 죄의 흔적을 간직한 인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 혈통 안에는 음모와 전쟁, 배신과 눈물, 권력의 오만과 인간의 무력함이 함께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오염된 혈통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왕됨이 끝나는 지점을 스스로의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의 왕조에서 나셨지만, 그 왕조의 영광을 이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왕조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은 그렇게 육신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다시 말해, 육신의 왕조는 죽고, 성령의 왕이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빛과 어둠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어둠의 세상, 시간의 굴레 안에 갇힌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성경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혼돈과 공허, 흑암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자, “
빛이 있으라” 하시며 날과 밤이 구별되었습니다. 빛이 온다는 것은 곧 구별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어둠과 섞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그 빛의 사건입니다. 빛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둠에 속한 것들이 드러나고 심판을 받습니다. “
그 날의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이 세상 역사 속의 마지막 날의 빛을 미리 비추신 사건이었습니다.

빛이 곧 시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은 신학적으로 놀라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빛은 변하지 않습니다. 빛은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시간이 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미 창세기에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니라.” 히브리어로 ‘’(욤)은 ‘시간’ 혹은 ‘’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빛이 곧 시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간은 빛보다 느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늙고, 쇠하고, 썩어집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달리는 존재, 빛과 연합된 존재에게는 시간이 멈춥니다. 그곳은 영원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점점 발을 떼어 영원의 현재로 옮겨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이 세상과의 접촉을 줄여 가며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나그네, 이방인, 하늘의 시민이라 부릅니다.

창세기 3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숨었다.” 히브리어로 ‘그 날의 서늘함’은 ‘루아흐 하 욤’ 직역하면 “그 날의 하나님의 바람”, 즉 빛의 하나님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오시자, 아담은 빛 앞에 설 수 없어 숨어 버렸습니다. 그는 어둠을 택했습니다. 죄는 언제나 빛을 피하는 것,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둠에 숨어버린 아담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부르심은 심판의 소리이자 동시에 은혜의 초청입니다. 그 빛이 심판이자 구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로마서 1장 3절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 곧 육신의 왕조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육신의 왕조는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인간의 왕됨이 무너지는 자리였고, 그분의 부활은 하나님의 왕권이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예수님 안에서 육신의 역사(다윗의 혈통)는 죽고, 성령의 역사(하늘의 아들)이 살아납니다. 그분은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인간의 나라가 끝나고, 그분의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가문, 성취, 신앙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그 혈통은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영광을 잇지 않으시고, 다윗의 혈통 속에서 죽으심으로 영광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안의 ‘
다윗 왕가’, 내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 내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의지, 내 이름을 세우려는 열심,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왕조를 무너뜨리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어디 있느냐?” “내가 네 안의 어둠을 비추리라.” 그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숨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님은 죽음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찾아와 영원의 빛으로 이끄시는 하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그 혈통은 죽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왕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육신의 왕은 죽고, 성령의 왕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
너의 왕됨은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빛이 너를 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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