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2~4)
바울은 로마서 1장 초입에서 복음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그의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넘어,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고, 어떤 방식으로 죽으셨고, 어떤 생명으로 살아나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특히 4절의 표현은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이 문장은 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복음인지, 그리고 부활이 우리 삶에 어떤 새로운 현실을 열어 주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부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 보려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설명할 때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 배경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육신”(카타 사르카)은 단순히 피부와 뼈의 몸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서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 자기 왕국을 세우고 싶어 하는 욕망, 힘과 성공을 좇는 세상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꿈꾸던 메시아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다윗 같은 강력한 정치적 왕을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뒤집고 이스라엘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 눈에 보이는 나라의 회복을 꿈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기대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육신의 세계, 타락한 인간이 꿈꾸던 왕국의 세계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과 함께 죽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옛 사람을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붙들던 힘, 우리의 성공 신화, 우리의 ‘될 성부른 인간상’, 우리의 종교적 의로움. 그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옛 사람의 세계를 대신 짊어지고 무덤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여기서 “성결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 곧 거룩의 본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낸 결정적 선포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의 빛이 어둠을 찢고 드러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왜 내게 복음인가?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나는 것 아닌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질문에 대해 명확히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첫 열매는 무엇입니까? 대표이자 시작입니다. 첫 열매의 존재는 전체 수확의 보증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라면, 그 뒤를 따라 열릴 전체 열매, 즉 성도들의 부활은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 사건이며, 우리가 따라가게 될 부활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미래의 윤곽이자, 우리 존재의 확증이며,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 됩니다.
성경은 부활을 두 종류로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 생명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활은 마지막 날에 주어질 새 몸의 부활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첫째 부활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의 증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한 자들, 세상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자들, 첫째 부활은 “이미 여기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이 시대, 성경이 ‘천년’이라고 상징하는 시대에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 노릇이란 세상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 왕 노릇은 옛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 죄를 이기는 통치, 하나님의 뜻을 삶에 구현하는 통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순간, 우리의 새로운 삶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 생명은 추상적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납니다. 첫째는 옛 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넘기는 삶입니다. 내 안에 아직도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나, 세상의 인정 없이는 불안해하는 나, 사람들에게 ‘괜찮아 보이고 싶은’ 옛 사람의 욕망을 날마다 십자가에 다시 넘기는 삶입니다. 부활 생명은 죽음 없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세상의 표를 받지 않는 삶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기준, 세상의 안전에 영혼을 내어주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부활한 사람은 세상의 표 말고 하나님의 표를 선택합니다.
셋째는 말씀 때문에 불편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항상 편안함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은 우리를 손해의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활 생명은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 때문에 순종합니다.
넷째는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의 흐름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부활 생명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첫 열매인 예수님 뒤에는 수많은 “우리”라는 열매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늘 나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전체의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섯째는 섬김의 왕 노릇을 사는 삶입니다. 부활한 성도의 왕 노릇은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통치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양보하고, 사랑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세상을 역전시키는 능력입니다.
지금,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도, 미래의 약속만도 아닙니다. 현재의 현실입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생명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 육신의 세계인 옛 사람의 힘과 욕망의 세계인가, 아니면 성결의 영으로 부활의 세계, 새 사람의 생명인가.
예수님은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뒤를 따르는 열매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부활한 자답게, 부활의 생명으로, 부활의 권세로, 주님과 함께 이 땅을 걸어가십시오. 주님과 함께 치열히 살지만, 동시에 주님과 함께 이미 승리한 사람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결의 영으로 부활한 자들의 삶, 곧 복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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