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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번쩍 들어 올려진 자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29.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로마서 1:6)

어떤 가정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여름은 가히 ‘
불가마’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뜨겁습니다. 한여름이면 기온이 섭씨 43도를 오르내리기 일쑤입니다. 더위가 극심하다 보니 작은 생물들조차 겨울 준비에 조급해집니다. 그중에서도 개미들은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달리며 먹을 것을 나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런 개미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적당히 공존하며 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째 아이는 다릅니다. 개미, 벌레, 거미… 뭐든지 뱀보다 더 싫어합니다. 그래서 집안 곳곳, 손 닿는 곳마다 개미 스프레이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둘째의 눈에 개미가 보이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
심판’이 시작됩니다.

어느 월요일 오후, 아빠는 뒤뜰에 나가 차 한 잔을 마시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역시나 뒤뜰 한쪽 구석에서 개미들이 줄을 이루고 열심히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의 부지런함이 오히려 감탄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주어진 일에 묵묵히 충실한 모습에서, 오히려 인간의 게으름과 변명과 교만이 떠올라 한참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바로 그때,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의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거기에 ‘
개미!’라는 비명과 함께 이어지는 건 개미 약 분사 소리였습니다. 그는 순간 ‘저 개미들에게 도망가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미가 제 말을 알아들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한 마음에 그 개미 무리를 손으로 흩어 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흩어져야 살아남을 것 같아서 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생물들은 놀라 우왕좌왕하더니 금세 다시 전열을 정비하며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결국 그는 그 중 두 마리를 조심히 집어 들어 조금 떨어진 평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상황을 모른 채 뒤뜰로 뛰어나온 둘째는 개미행렬을 발견하자마자 아무 망설임 없이 개미 약을 흩뿌렸습니다. 그 행렬은 순식간에 처참한 살육의 장면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아이의 공격은 개미 집 입구까지 이어졌고, 조그마한 구멍 안으로 개미 약이 흥건히 스며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득 평상 위에 옮겨놓은 두 마리가 생각났습니다. 만약 그들도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그 잔혹한 ‘
심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알 수 없는 존재, 그들의 눈에는 결코 인식될 수 없는 존재가 그들을 번쩍 들어 올려 죽음과는 전혀 다른 자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두 마리는 자신들이 있던 곳의 참혹함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원래의 길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원래 자리 근처까지 옮겨주었습니다. 그들은 한참 헤매다 마침내 그 익숙한 길 근처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개미 약의 독성을 감지한 듯 흠칫 놀라더니 곧장 “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 두 마리 개미에게 인간과 같은 사유 능력,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자신의 삶의 터전이라고 믿었던 그곳, 열심히 일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맡길 수 있다고 여겼던 그 자리, 그곳이 사실은 이미 죽음이 밀려온 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상실감, 박탈감, 두려움, 혼란, 배신감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대체 누가 나를 이곳에서 들어 올린 것일까?” “왜 하필 나였을까?" 그들의 이해와 의지와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만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들어 올려’ 주었기 때문에 살았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6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부활로 능력 있게 ‘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은혜가 주어지고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길을 찾은 존재가 아니라 ‘
그리스도에 의해 번쩍 들어 올려진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기 나름의 꿈을 꾸며 땅만 보며 살았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으며 달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 위에 이미 심판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부르심으로 우리를 그 자리에서 옮기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
그분의 자리’에다 그대로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평상에 올려진 두 마리의 개미가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우린 그냥 일하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들어 올렸어. 내가 잘 나서 살아남은 게 아니야.” 그리고 결국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린 그 존재에게 빚진 자야.”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똑같습니다.

우리가 눈이 밝아서 복음을 본 것도 아니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죽음의 행렬 속에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땅을 보며 달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으로,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
원래 그 자리’를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길은 이미 죽음이 덮인 길이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들려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옮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분의 손에 의해 새 자리로 옮겨진 존재이기에, 그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께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고백은 이 하나여야 합니다. “
주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은혜로 옮겨진 자,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