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서 1:3~6,새번역)
어느 가정은 여름이면 늘 개미들과 함께 삽니다. 지독한 더위로 한여름 기온이 섭씨 42도를 넘나드는 곳에 살다 보니, 여름철이면 집 안팎이 온통 개미들의 출퇴근길입니다. 그 집의 아빠는 개미가 조금 집에 들어오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다릅니다. 개미 하나를 보면 뱀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는 집안 곳곳에 스프레이를 놓아두고 다닙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은 개미들에게 ‘심판의 날’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월요일 오후였습니다. 아빠는 뒤뜰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평상에 걸터앉아 부지런히 줄지어 움직이는 개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디작은 존재들이지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게으름을 떠올리게 하며 묵상으로 이끌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우리 둘째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개미!” 특유의 비명 섞인 외침과 함께 개미 약이 분사되는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아빠는 순간 개미들에게 경고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얘들아, 빨리 도망가! 곧 사망의 폭풍이 닥쳐온단다!” 그런데 개미가 제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손으로 개미의 줄을 흩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잠시 우왕좌왕하던 개미들은 금세 다시 대열을 잡고 원래 자신들이 가던 길을 향해 꾸역꾸역 걸어갔습니다. 죽음이 코앞까지 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는 그 중 두 마리를 집어 조용히 평상 위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들만큼은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딱 그 순간, 둘째 아이가 뒤뜰에 들어왔고, 개미 약은 물총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장면은 참혹했습니다. 개미의 집 입구까지 추적해 구멍이 젖어 흐를 정도로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내가 올려놓은 그 두 마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상 위를 살펴보니 그 두 마리는 자신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도,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전처럼 원래 자기 길을 찾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원래 길 근처로 살짝 이동시켰습니다. 조금만 찾으면 될 만큼의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개미들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멈칫했습니다. 개미 약의 독한 냄새를 감지한 것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기 길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앞은 이미 ‘사망의 길’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반대 방향을 향해 도망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개미에게 인간과 같은 지성과 사유가 있다면, 지금 자기들이 경험한 일을 어떻게 해석할까?”
그 두 마리의 이름을 ‘태종’과 ‘병주’라고 붙여보았습니다. 두 마리가 도망가면서 대화를 나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병주: “야, 태종아, 너 어떻게 살았냐? 어떻게 저 심판이 닥치기 전에 저 평상으로 올라간 거냐?”
태종: “나도 몰라. 그냥 평소처럼 일만 하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누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다른 곳에 내려놓더라.”
병주: “나도 그래. 난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아 보려고 진짜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누가 날 들고 옮겨놨어. 도대체 그게 누구일까?”
두 마리는 방금 본 죽음의 참상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게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보다 더 큰 존재가 우리를 살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부르심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어느 날 마음먹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고자 애쓰며 자기 길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던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를 번쩍 들어 올리셨습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살리는 자리로, 멸망의 공동체에서 생명의 공동체로, 육신의 어둠에서 아들의 빛으로, 부르심은 인간의 의지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단에서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적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잡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을 결심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믿도록 만드시고, 그 믿음이 순종으로 열매 맺게 하십니다. 믿음도 은혜이고, 순종도 은혜입니다. 부르심으로 시작된 은혜가 평생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진짜 상급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상급을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상급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상급의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 자체입니다. 두 개미의 가장 큰 상급은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들을 건져 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상급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것 자체가 이미 최고의 상급입니다.
두번째는 성령 안에서 순종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순종은 억지로 짜내는 결심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뤄내시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이 변화 자체가 상급입니다. 세번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깊어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깊이를 배워갑니다. 그 누적되는 깨달음이 곧 영광이며 상급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죽음의 대열 속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날, 우리가 원한 적도 없는 그 순간에 우리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기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상급은 내가 무엇을 이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인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는 오늘도 우리를 믿음으로 순종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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