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니라."(로마서 1:3~6)
어떤 동화를 읽을 때마다 유난히 마음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이 백성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면 잘 가꾼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한 이야기입니다. 단, 조건은 하나, 오직 임금이 준 씨앗으로만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것이 임금의 뜻이므로 온 마음을 다해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씨앗은 전혀 싹을 틔우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을 받기 위해 정직을 포기하고, 시장으로 가 같은 종류의 새로운 씨앗을 사서 자신의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화분마다 화려한 꽃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임금 앞에서 영광을 받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가을,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백성들은 각자 화사한 꽃을 들고 왕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왕의 표정은 점점 침울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 소년이 싹조차 없는 빈 화분을 들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왕 앞에 나섭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울먹이며 말합니다. “임금님, 저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온 힘을 다하여 가꾸어도 씨앗은 싹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벌을 주십시오.” 그러나 임금은 그 아이를 껴안으며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진짜로 꽃을 피웠구나. 내가 원했던 꽃이 바로 이것이란다.” 왕은 모든 백성에게 썩은 씨를 준 것이었습니다. 상벌의 기준은 꽃이 아니라 ‘정직함’이었습니다.
썩은 씨를 받은 인간은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속에서 우리의 신앙 현실이 겹쳐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씨”, 즉 “죽을 몸”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는 또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만 행하는도다.”(롬 7:18~19)
성경은 인간의 몸을 “죽은 몸”(롬 8:10)이라 부릅니다. 이 몸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싹을 틔울 수 없는 화분, 아무리 수고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씨앗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불가능한 씨앗’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더 열심히, 더 깨끗하게, 더 경건하게…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열매의 주인은 가지가 아니라 줄기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열매의 주체가 ‘가지’가 아니라 ‘줄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는 그저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존재입니다. 열매는 줄기가 맺습니다. 줄기에서 오는 생명이 가지를 통과하여 열매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런 고백으로 요약됩니다. “주님, 제게는 싹 낼 능력도, 열매를 맺을 능력도 없습니다.” 정직한 고백은 왕 앞의 소년이 보여준 바로 그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성공한 꽃’이 아니라, 정직한 빈 화분입니다.
은혜의 비밀은 왜 우리 안에서 예수만이 열매를 맺는가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라.”(롬 8:10)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죽어 있는 씨앗, 썩은 씨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 안에서 “의”, 즉 예수님의 의가 역사하여 영이 살아납니다.
이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우리 안에 살고 계신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갈 5:22~23). 우리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 의지, 결단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피어나는 단 하나의 선함도, 단 하나의 거룩도, 단 하나의 순종도 모두 예수의 열매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도록 허락하시는가?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왜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며 절망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절대 의존적 존재’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취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내길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아버지만 의지하며 다른 모든 의지처를 놓아버리는 존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아이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 존재, 늘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 아버지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실패를 허락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이렇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 화분에는 어떤 힘으로도 꽃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계신 예수께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성도의 상급으로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가? 많은 이가 궁금해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알겠는데, 상급은 무엇인가?” “내 순종과 열심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성경적 답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열매의 양’이 아니라 ‘열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신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은 자신의 열심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열매를 들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의 진짜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난 만큼입니다. 열매의 기준은 “얼마나 많이 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예수의 역사인가, 내 의욕의 산물인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 삶에 열매가 나타났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이 열매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 화분은 본래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 안에 오셔서 당신의 열매를 맺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하고, 뭔가가 되지 않을 때 나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 화분에 싹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제 한계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더 깊이 당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고백이 바로 상급입니다. 그 고백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정직함입니다.
빈 화분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꽃을 피운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의를 이룬 자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만이 열매를 맺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 빈 화분을 들고도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사람, 자신의 무능을 기꺼이 드러내고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그 사람, 바로 그가 “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이며, 하나님이 상 주시는 자입니다.
주님, 제가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소서. 스스로 의로워 보이고자 했던 마음을 버리고 정직한 빈 화분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제 안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열매를 맺으시도록 제 삶을 열어드립니다. 오늘도 저를 부르시고, 순종케 하시며, 당신께 속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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