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태초는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역사의 시작’이나 ‘세상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태초(레쉬트)’는 시간 자체의 창조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영원의 충만 속에서 시간이라는 질서가 시작되던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태초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물질이나 외부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그 존재의 본질 자체가 자존자요 영원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곧 물질 세계의 시작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며, 모든 존재와 삶의 궁극적 의미의 근거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창조하다'는 동사 '바라'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는 인간의 상상이나 철학적 추론이 닿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재료를 조합하거나 가공하는 인간의 창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입니다. 완전한 무에서 시간과 물질이 터져 나온 사건이 성경이 말하는 창조입니다.
우리가 이 창조의 진리를 믿는 것은,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시고 선포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인간의 이해에 앞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 “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려고 만든 주의 작품이다.”(사 60:21)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고 나타낼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허공이나 비물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을 반영할 수 있는 그릇입니다. 별들과 행성과 생명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는 반사경입니다. 곧, 존재란 하나님의 영광이 형상화된 방식이고, 창조란 그분의 영광이 시공 안에 물질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흔히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존재는 ‘고유함’을 가지면서도 흐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지만 그 본질은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지만, 그분의 뜻은 시공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지며, 그 역사는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첫 창조는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함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 충분한 구조로서의 완전함입니다. 다시 말해, 에덴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그 나라에 대한 ‘힌트’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참된 인간성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첫 창조는 궁극적 목적이 아니며, 새 창조의 방향을 암시하는 전초였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작정이 시공 속에 드러난 시작점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여정의 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타락은 우발적인 사고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도 작정하신 것일까요?
이 지점은 인간의 이성과 이해로는 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악과는 전혀 무관하신 분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를 ‘섭리의 신비’로 설명하며, 하나님은 제1 원인이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침해하지 않으시고, 죄는 인간과 타락한 천사들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창 50:20) 인간의 악한 의도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 안에서 사용되며, 결국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를 이루는 도구로 쓰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신앙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긴 여정을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이 단지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미하는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억지와 강제가 아닌, 이성과 인격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타락의 쓴 열매를 충분히 맛보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다시는 타락을 꿈꾸지 않는 자들로 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복(說服)의 방식입니다. 창조와 타락, 구원과 회복, 이 모든 역사의 드라마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설득해 나가시는 여정입니다. 그 길 끝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새 창조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곳은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평화의 땅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새 창조를 향한 순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 목적을 향한 합당한 존재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 유익과 자랑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며 사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창조의 의미를 안다면, 삶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시간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첫 창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를 통해 구원을 이해하고, 구원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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