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더라.”(창세기 1:6~8)
우리는 죄악의 깊이, 부족함과 연약함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잘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궁창처럼 우리를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둘째 날의 말씀과 그 깊은 구속사적 연결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펼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그 사이에 질서와 법칙과 생명의 틀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존재할 수 있도록, 산소와 질소의 비율 하나까지 정밀하게 설계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배려와 보호가 ‘궁창’ 안에, 곧 우리가 매일 들이쉬는 호흡과, 우리 머리 위 푸른 하늘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궁창은 단순한 대기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과 같았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찢어졌습니다. 성막의 물두멍도, 홍해도, 요한복음 속의 세례도, 모두 그 하나님의 구속 역사 안에서 우리를 위한 그림자였습니다.
죄인은 번제단 앞에서 죽어야 했고, 물두멍에서 씻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리 힘으로 씻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던 우리를 대신해 물두멍을 부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새로워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의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보호하심을 기억하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볼 때, 그것이 단순히 대기권이 아닌 하나님의 휘장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휘장이 예수로 인해 찢겨졌음을 기억하십시오. 더 이상 막힌 담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나누던 궁창도, 물두멍도, 휘장도 다 찢기고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둘째 날의 장면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자연 현상인 하늘과 물의 구분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고도 영원한 구속사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궁창’이라는 단어 속에는 단지 대기층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 분리와 회복, 그리고 종말의 새 하늘과 새 땅까지를 아우르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라키아(궁창)’라는 이 단어는, ‘망치로 두드려 펼친 금속판’ 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금속판처럼 단단하고 광활한 하늘을 펴셔서, 물과 물 사이에 경계를 만드셨습니다. 이 경계는 단지 물리적 공간의 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곧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하늘과 죄로 물든 인간의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상징합니다.
이 분리는 단순한 공간적 분리가 아니라, 존재론적 단절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에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구덩이가 생겨난 것이며, 그 사이에 궁창이 버티고 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궁창’은 단지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스스로는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는 커튼, 휘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계는 단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아직 사람도 짐승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기’라는 놀라운 선물을 예비하셨습니다. 산소와 질소의 비율, 대기압, 공기 밀도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설계하거나 유지할 수 없는 법칙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소비하는 공기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그것은 수천만 원, 어쩌면 억 단위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공기를 공짜로, 그것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갚을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막에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기서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생적 행위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씻음, 즉 정결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의 ‘궁창과 물’이 상징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늘과 인간의 땅 사이에는 물두멍과 같은 ‘물의 장벽’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그냥 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인들과 연합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물두멍을 쪼개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씻지 않아도, 은혜로 씻김받을 수 있도록, 그 물을 대신 마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는 하나님의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7장에서, 궁창 위에 있던 물이 쏟아진 사건, 바로 노아의 홍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물을 통해 임한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궁창 위에 고이던 물이 저주가 되어 인간에게 쏟아졌습니다. 물두멍을 정결 없이 건너려는 모든 인간에게 물이 심판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는 은혜로 예비된 피난처였고, 그 안에 있던 자들은 그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방주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물과 피를 흘리셨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궁창’이 제거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하늘과 땅이 분리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물은 심판이 아니라, 이제 생명이 되어 생명수의 강으로 흐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그 완성의 그림입니다. “다시 바다(물두멍, 경계, 심판의 물)가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며,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는 이 놀라운 결말은 창세기 둘째 날의 ‘분리’로 시작된 이야기의 종착점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둘째 날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직 숨 쉬기 어려운, 틀이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틀마저도 은혜로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어 ‘라아’, 보시다는 감찰하고, 보호하며, 돌보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라아’하고 계십니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감시가 아닌 보호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토브’, 선하고 온전한 존재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주여,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당신의 신비롭고 섬세한 사랑의 표현인 줄 이제야 깨닫습니다.
궁창을 펴시고, 물과 물 사이를 나누시며
하늘과 땅을 가르신 그 날에도
이미 당신은 우리와 화목하실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며
하늘과 땅을 다시 잇고,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날마다 숨 쉬며 찬양하게 하소서.
라아, 감찰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나를 보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 시선 아래 담대히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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