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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행복이라는 신기루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9.

민준 씨는 매일 아침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마십니다. 처음 마셨을 때, 그 쌉싸름한 향과 온기는 하루를 버틸 힘을 줬습니다. 하지만 3년째 매일 같은 커피를 마시는 지금, 그는 더 이상 그 순간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습관입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원하는 건 다 갖고 있는데." 이 질문은 사실 우리 대부분이 품고 사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행복을 좇는 가장 흔한 방식은 감각적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재미있는 게임, 짜릿한 쇼핑, 문제는 이 감각들이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연애 초기, 손만 스쳐도 심장이 뛰던 그 떨림을 기억하십니까? 1년만 지나도 그 떨림은 사라집니다. 처음 먹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그 음식도, 매일 먹으면 그냥 밥이 됩니다. 뇌과학자들은 이것을 '
쾌락 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뇌는 같은 자극에 금방 무뎌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무뎌진 자극에 다시 예전 같은 짜릿함을 느끼려면, 강도를 올리고 빈도를 늘려야 합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이 처음엔 만 원짜리 판에서 시작했다가 결국 전 재산을 걸게 되는 이유, 술을 처음엔 한 잔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매일 밤 없이는 잠들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감각으로 채우려는 행복은 채울수록 더 큰 구멍을 냅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온갖 중독을 경험한 뒤 이런 통찰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술, 담배, 마약에 손대는 순간은 대개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때,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싶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의 양심이 또렷하게 깨어 있는 게 불편해서, 일부러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는 겁니다.

톨스토이가 전하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화가 브률로프가 제자의 그림을 손봐줬는데, 겨우 몇 군데만 살짝 고쳤을 뿐인데 그림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자가 "
선생님은 아주 조금밖에 손대지 않으셨는데요?"라고 투덜대자, 화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술은 바로 그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되는 거란다." 톨스토이는 이 말을 삶 전체로 확장했습니다.

진짜 인생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소파에 누워
'이번 달 월세를 어떻게 낼까', '부모님께 손 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사소한 고민을 할 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 우리 머리가 가장 맑아야 할 그 순간에, 맥주 한 캔과 담배 한 개비가 우리의 판단력을 슬쩍 흐려놓습니다.

행복감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퇴근 후 친구와 나누는 치킨 한 마리, 격의 없는 수다는 삶에 꼭 필요한 활력소입니다. 문제는 이 '
특별한 순간'을 일상 자체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매일 외식을 하면 그게 더 이상 특별함이 아니라 그냥 '집밥'이 되는 것처럼, 행복감을 일상화하려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갉아먹는 갈증이 됩니다.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쓴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여행 중 한 브라만(인도의 학자 계급)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지성과 학식, 부와 안정된 삶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볼테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유를 묻자 그는 답했습니다. "40년을 공부했지만 다 헛수고였습니다.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왜 악이 넘치는지 사람들이 나에게 묻지만, 저도 그들만큼이나 답답할 뿐입니다. 옛 책들을 읽을수록 오히려 어둠만 두 배로 늘었습니다."

같은 날, 볼테르는 그 브라만의 옆집에 사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브라만을 괴롭히는 그 어떤 심오한 질문도 평생 단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소박한 믿음 하나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볼테르는 브라만에게 돌아가 물었습니다. "
옆집 저 아무 생각 없는 할머니는 저렇게 만족하며 사는데, 당신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브라만은 답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도 제 이웃처럼 생각 없이 살면 행복해지리란 걸 백 번도 넘게 되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행복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은 뼈아픕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더 행복하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할까요? 어쩌면 삶에는 행복보다 더 소중한 가치, 이를테면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깊이 생각하는 능력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하세계에서 데려올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건은 하나, 지상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하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고, 그 순간 아내는 영영 사라져버렸습니다. 행복도 이와 같습니다. 붙잡으려 애쓸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여러 심리학 연구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쉽게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
나는 지금 행복한가?"를 자꾸 점검하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행복을 밀어냅니다.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행복(happiness)'이라는 영어 단어는 고대 독일어 'happ', 즉 '행운'에서 나왔습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행복도 어원은 '행운'입니다. 프랑스어 'bonheur' 역시 '좋은 운'을 뜻하고, 고대 그리스어 'eudaimonia'는 '좋은 정령이 함께함'이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인류는 오랫동안 행복을 개인이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 같은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이 관념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개인이 노력하면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10조에도 "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우리는 이 모든 걸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권리'로 여기며 평생을 질주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대신, '
좋은 삶'을 목표로 삼고 행복은 그 부산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밥 먹기 전 가볍게 하는 운동, 밥 먹고 난 뒤의 여유로운 산책, 하기 싫지만 끝까지 해내는 인내, 형편이 넉넉지 않아도 나누는 작은 기부, 당장은 힘들어도 내 영혼에 맞는 일을 찾아 헤매는 방황, 이런 것들 자체는 '행복'을 목표로 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삶에 의미를 채워주고, 그 의미가 쌓이는 과정에서 행복감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민준 씨가 매일 마시는 커피에서 더 이상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 커피 자체가 그의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가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밤, 그는 "
행복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마음이 꽉 찬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 남기는 부산물로서의 행복입니다.

행복은 쫓아가서 붙잡을 수 있는 사물이 아닙니다. 봄날의 아지랑이나 무지개처럼,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행복 그 자체를 좇는 대신 좋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뒤돌아볼 때쯤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
아, 그때 내가 행복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