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건 어느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 친구는 오랜만에 들어온 의뢰를 놓치기 싫어서, 평소 받던 금액보다 훨씬 낮은 조건에 덜컥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렸다고 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지하철에 올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상대방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계약은 끝났고, 이제 와서 금액을 다시 조정하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 후회와 자책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돌아서는 순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 상대의 제안 앞에서 허둥대다가 얼떨결에 승낙해버린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협상이 틀어졌을 때 꺼낼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협상연구소에서 만든 개념 중에 '배트나(협상 실패 시 선택 가능한 최선의 대안)'라는 것이 있습니다. 협상이 결렬됐을 때 내밀 수 있는 차선의 카드, 쉽게 말해 나만 알고 있는 '믿는 구석'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엄마, 새로 나온 레고 갖고 싶어요. 사주세요." "수학 시험에서 100점 받으면 사줄게." "그럼 할머니한테 얘기할래요. 할머니는 100점 안 받아도 사주실 거예요." 여기서 아이는 할머니라는 배트나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대화가 여기서 끝난다면 승자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엄마에게도 카드가 있습니다. 할머니께 미리 전화를 걸어 "애가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이번엔 안 사주시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해두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이의 배트나는 힘을 잃게 됩니다. 협상은 결국 누가 더 튼튼한 대안을 쥐고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원리를 몸으로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일본 교토, 청수사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작은 호리병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가격을 물었습니다. "이 작은 호리병은 얼마예요?" "천 엔입니다." "생각보다 비싸네요. 다른 가게도 둘러보고 결정할게요." 이건 그 사람의 배트나였습니다. '이 가게가 아니어도 살 곳은 많다'는 무언의 압박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희는 200년째 이어온 가게예요. 게다가 이 호리병 안에는 저희 가게에만 있는 작은 구슬이 들어 있답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호리병을 샀습니다. 주인은 손님들이 흔히 꺼내드는 "다른 데도 가볼게요"라는 카드를 이미 예상하고, 그것을 무력화할 자신만의 배트나인 200년의 역사와 대체 불가능한 구슬을 준비해둔 것입니다.
협상에서 더 힘 있는 쪽은 언제나 더 강력한 대안을 가진 쪽입니다. 취업 준비생이 지원한 회사에 비슷한 스펙의 지원자가 많다면 회사 쪽 배트나가 강하고, 반대로 업계에 흔치 않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지원자 쪽 배트나가 강해집니다.
배트나를 가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유리함이 따라옵니다.
첫째는 여유입니다. 대안이 없으면 협상이 깨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상대의 요구에 끌려다니기 쉽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 어디에서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한 채 면접을 보는 사람과, 이미 두 곳에서 입사 제안을 받아둔 채 면접을 보는 사람, 둘 중 누가 더 편안한 얼굴로 면접장에 들어설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는 더 나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배트나는 협상의 기준선이 되어줍니다. 한 웨딩 사진작가가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는 촬영비 100만 원을 기준으로 잡고, "80만 원 이하는 절대 안 받는다"는 단순한 하한선을 정했습니다. 이 기준은 지나치게 낮은 금액의 일을 걸러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완벽한 기준은 아닙니다. 만약 70만 원에 촬영을 해주는 대신 그 고객이 주변에 소개를 많이 해준다면, 그게 오히려 더 나은 대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트나는 단순한 '차선책'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지여야 합니다.
배트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개발해야 합니다. 5억 원짜리 집을 내놓았는데, 매수자가 4억 5천만 원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단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대안을 나열합니다. 그냥 4억 5천만 원에 팔 수도 있고, 원하는 가격을 제시할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집을 수리해서 값을 올려 다시 내놓거나, 팔지 않고 임대로 돌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2단계, 그중 가장 현실적인 대안 몇 가지를 추려 구체화합니다. 만약 4억 5천만 원에 팔기로 한다면, 이사 날짜를 내가 정하는 조건이나 은행 대출 잔금을 매수자가 인수하는 조건을 붙일 수 있습니다.
3단계, 최고의 대안을 선택해 협상에 들어가며 세부 조건을 조율합니다. 이렇게 준비해두면 상대가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흔들리지 않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배트나를 준비해놓고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아무 힘이 없습니다.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배트나는 마음의 안정은 줄 수 있어도 협상 테이블 위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배트나를 꺼내는 첫 번째 방법은, 적절한 순간에 슬쩍 내비쳐서 자연스럽게 압박하는 것입니다. 단, 절대 직접적으로 협박하듯 꺼내서는 안 됩니다. 연봉 협상 중인 직장인이 얼마 전 다른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해보십시오. 이럴 때 "원하는 대로 안 해주시면 그만두고 경쟁사로 갈 거예요!"라고 말하면 상사는 협박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이 앞서 "그럼 그쪽으로 가시죠"라는 답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설령 회사에 남더라도 상사와의 관계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워진 뒤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얼마 전 경쟁사에서 지금보다 20% 높은 연봉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어요. 가족들도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조건만 맞는다면 여기 계속 남고 싶습니다." 핵심은 '당신을 이기려는 게 아니라, 서로 만족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제시한 조건이 내 배트나보다 못하다면, 그 협상은 미련 없이 접는 편이 낫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배트나를 직접 말하지 않고 제삼자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리는 것입니다. 홍콩 정부가 디즈니랜드를 유치할 때 이 방법을 썼습니다. 당시 디즈니 측은 각종 세제 혜택과 비용 지원을 무리하게 요구했습니다. 정면으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맞섰다가는 협상이 더 꼬일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홍콩 정부는 이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습니다. "아이들의 꿈을 파는 기업이 지나친 경제 논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논조로 말입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디즈니는 결국 기업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조건 일부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트나는 상대를 압박하는 데 분명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 힘이 관계를 부수는 협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다루는 지혜가 함께 필요합니다. 잘 준비된 배트나는 때로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지만, 때로는 그 협상 자체를 미련 없이 접을 수 있게 해주는 용기이기도 합니다. 판단해야 할 순간에 우물쭈물할수록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줄어들게 됩니다.
친구의 이야기에서 그날 친구에게 부족했던 건 협상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대안, 그리고 그 대안이 주는 여유였습니다. 배트나는 타고나는 재능이 아닙니다. 매번 새로운 상황 앞에서 스스로 준비하고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상대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나만의 대안을 하나씩 그려보십시오. 결국 그 대안이 쌓여 만들어내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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