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10)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의 인식 대상, 사고의 객체로 두고 이해하고 판단하며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접근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사유,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분일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방식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인식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에서 출발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와 판단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의 지식으로 포착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표현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인식한다는 말에는 언제나 판단과 선택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판단하여 옳다고 여기는 하나님,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인간 중심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식 없이 믿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앎’은 인간이 도달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심으로 주어지는 앎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공허한 상태에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반응이 따릅니다. 참된 믿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과 감사는 막연히 생겨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문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인지는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드러난 사실 앞에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이 비추이면 어둠을 논증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이 말씀은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모든 감각과 사유 영역 바깥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결정적입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떠올려지는 하나님, 인간의 기대와 욕망이 투영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마음에 품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왜곡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으로 그려낸 하나님, 마음으로 납득되는 예수는 대부분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종교적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진 지혜’라고 부릅니다. 이 지혜는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며,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졌다’는 말은 단순히 숨겨두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 종교적 열심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감추어진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어디에 감추셨습니까? 만약 그리스도를 세상의 영광과 권능, 성공과 번영 속에 두셨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라면 은밀한 지혜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수는 언제나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삶이 잘 풀린다, 천국에 간다." 이 모든 말의 중심에는 ‘나’가 있습니다. 예수는 나를 위한 수단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감추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기대와 정반대의 자리입니다. 실패와 저주, 수치와 죽음의 상징입니다. 인간이 결코 하나님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성령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보이셔야만,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나는 십자가를 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용서받았고, 구원받았다는 고백을 십자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고백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십자가는 여전히 ‘나의 구원’을 보장하는 도구로 기능합니다. 죄의 문제는 말하지만, 그 죄로 인해 무너져야 할 나 자신은 그대로 둡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7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처소, 곧 지성소가 이방인에게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두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던 장소가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은 은밀한 처소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을 관리하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처소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노출’이었습니다. 지성소에서는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 피는 인간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다는 표지였습니다. 은밀한 처소는 인간의 죄가 가려지는 장소가 아니라, 폭로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밀한 처소를 무너뜨리심으로 그들의 종교적 착각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가장 깊은 곳까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신앙 행위가 모두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 고백이 없는 십자가는 여전히 감추어진 지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노출과 고백이 없는 신앙은 십자가를 말할 수는 있어도, 십자가를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손으로 행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섬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 본 적이 있는지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행한 것이 많을수록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이스라엘의 오류와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남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를 보게 된 사람은 결국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은 겸손의 수사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자의 필연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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