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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삶, 은혜와 평강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3.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린도후서 1:1~2)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묻습니다. 어떤 직장을 선택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어디로 이사 갈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선택지마다 정답을 숨겨두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면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성공이나 안전을 보장하는 개인 맞춤형 플랜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도도, 성도들의 사도도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뜻 안에 '나'는 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바울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단순히 구경만 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무슨 말을 했기에 죽임을 당했을까요? 그는 유대인들이 믿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선함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거짓이라고 폭로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사울(바울의 이전 이름)에게도 직격탄이었습니다. 그 역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며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스데반이 죽는 걸 막지 않으셨을까요? 스데반을 살리시고 사울도 즉시 구원하셨다면 복음 전파에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방식의 구원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나중에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단순히 종교적 열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로움과 자기 방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임을 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었는지, 자기 의로움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생생히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임을, 사도직은 자신을 위한 명예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라는 소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순종하고 이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은혜와 평강… 얼마나 좋은 단어들입니까? 우리는 모두 이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은혜와 평강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은혜를 통해 삶이 편안해지고, 평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합니다. 건강, 경제적 안정, 관계의 평온함… 이런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어떨까요? 돌에 맞아 죽는 그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었을까요? 우리 기준으로는 아닙니다. 바울은 어떨까요? 복음 때문에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심지어 사도직까지 의심받은 그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이 있었을까요?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편안함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의 현장이고, 인간의 영광이 철저히 짓밟힌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인간이 자기 방식의 구원을, 자기 의로움을, 자기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는 이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던 인간적인 은혜가 거짓이었음을 깨닫는 것, 내 방식, 내 노력, 내 의로움이 구원과 아무 상관없음을 아는 것,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환난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환난을 제거해주시는 게 아니라, 환난 속에서 함께 계시며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문제 해결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평탄한 길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험한 길에서 동행하십니다.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여전히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가정의 평화, 건강, 경제적 안정… 이런 것들을 기도합니다. 심지어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 온 세계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해달라"고 큰 규모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내 소유로 만들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인간의 욕망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로 안다는 것은 내가 원하던 것들이 쓸모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방식이 아닌 십자가만이 구원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비로소 평강이 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 아닙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사람은 염려와 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스데반처럼 죽어도, 그것이 생명에 속한 자의 죽음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 더 이상 인생의 전부가 아닌 사람입니다.

물론 여전히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우리는 연약하니까요. 하지만 그 연약함 속에서 다시 십자가를 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함을 자각하면서,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은혜와 평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믿음으로만 경험됩니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떤 은혜와 평강을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리고 조용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성도 된 나는, 여전히 내 뜻을 놓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 속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거기 내 은혜가 있고, 내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