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립보서 2:17~18)
오늘의 짧은 본문에는 ‘기뻐하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빌립보서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 역시 기쁨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쁨의 편지가 감옥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도 자신이 기뻐하고 있으니, 성도들 또한 함께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전제(奠祭)’란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를 가리킵니다(출 29:40; 레 23:13). 전제는 단독으로 드려지기보다 다른 제사에 곁들여 바쳐지는 제물입니다(민 28~29장). 바울의 말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포도주처럼 부어져 사라지는 존재가 된다 해도, 곧 죽음에 이른다 해도, 그는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죽을 만큼” 기뻐하는가?
우리의 일상 언어에는 ‘죽겠다’는 표현이 넘쳐납니다. 배가 고파도, 화가 나도, 외로워도, 괴로워도 “죽겠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배가 불러서, 기뻐서, 좋아서, 보고 싶어서 “죽겠다”고도 합니다. 이 모든 표현은 자기중심적 가치판단에서 나온 감정의 언어입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유익하거나 불리하냐에 따라 기쁨과 절망을 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주인인 채로 예수를 내 삶의 한 요소로 들여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 됨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빌 1:20).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로마서 14장은 이 믿음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한 성령을 받아 한 주님을 믿는 공동체 안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판단하고 업신여깁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이유로 연약한 자를 정죄하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피해자로 여깁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옛 사람의 흔적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과 죽음의 주도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임을 아는 자는, 형제를 판단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사인가, 예배인가
오늘 본문을 여러 번역으로 읽어보면 표현의 차이가 눈에 뜁니다. ‘믿음의 제물과 섬김’, ‘믿음의 제사와 예배’, ‘내 피를 붓는 일’ 등 제사적 언어가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인 우리는 지금도 제사를 드리는가?
히브리서 10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에 따른 제사는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하며, 짐승의 피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장차 올 참된 제사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오직 한 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신 그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용하는 제사 언어는 무엇입니까. 이는 문자적 제사가 아니라 ‘그림 언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바울의 사역을 위해 후원하며 동역하는 삶, 그 삶 자체를 바울은 제물, 향기로운 제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
로마서 12장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특정 장소나 의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삶의 방식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전 존재적 응답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사랑, 섬김, 환난 중의 인내, 원수에 대한 축복,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 여기에 제단도, 제물도, 피 흘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삶을 ‘산 제물’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신약적 예배인 것입니다.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지는 전제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믿음의 제물 위에 자신이 전제처럼 부어져도 기쁘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바울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주된 제사는 빌립보 성도들의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바울은 그 위에 곁들여지는 전제에 불과합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들이 세워지고, 성도들이 서로 섬기는 그 일 위에 자신의 생명이 덧붙여지는 것을 그는 영광으로 여긴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기쁨
인생은 짧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안개, 그림자, 입김에 비유합니다. 기대했던 것들은 무너지고, 몸은 쇠해 갑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바울에게는 분명한 답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기쁨, “차라리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기쁨입니다. 베드로 역시 말합니다. “보지 못하나 믿으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느니라”(벧전 1:8).
아가서 8장은 이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과 견줄 수 없습니다. 죽음을 통과해 부활로 드러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그 사랑하신 분을 위해 죽는 것조차 기쁨이 됩니다.
죽어도 기쁜 일
바울의 기쁨은 자기성취나 성공에서 오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이 일어나며,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 데서 옵니다. 그 일 위에 자신의 생명이 전제처럼 부어지는 것을 그는 기뻐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그리고 사나 죽으나 주께 속한 삶으로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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