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4)생명의 말씀을 5)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립보서 2:14~16)
사람은 구원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쉽게 원망합니다. 기도 제목은 많고, 감사의 제목은 적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늘 불편하고, 공동체 안에서도 시비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구원이 크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무게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 말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존재적 요구입니다.
바울은 이미 앞선 말씀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구원을 잃을까 조마조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원이 얼마나 크고, 무겁고,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인지를 아는 자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두렵고 떨림’을 신앙적 긴장이나 도덕적 경건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두려움은, “내가 이 큰 구원을 이렇게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만 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우리가 사소한 일로 원망하고, 자기 주장 때문에 공동체를 갈라놓고, 옳고 그름을 가려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잃어버린 징후입니다.
성경에서 원망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했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고 말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의 군대가 수장된 지 불과 사흘 만에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며 불평했습니다. 두 달이 지나 양식이 떨어지자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예배 후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감사는 사라지고 불만이 고개를 듭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셨지만, 오늘의 상황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건 제 뜻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불뱀이 나와 백성을 물었습니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은 십자가로 해석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원망의 끝에는 늘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 한가운데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원망을 없애는 방식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원망을 받아낸 자리입니다. “왜 이런 메시아냐”는 군중의 분노,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제자들의 침묵과 배신까지 모두 그 위에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원망이 가장 극심한 자리에서 용서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원망과 시비 없이 사는 삶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늘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합니다. 뉴스를 켜면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편을 가릅니다. SNS는 작은 원망을 증폭시키는 확성기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침묵을 선택하고,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빛이 되는 자리입니다. 빛은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빛은 상대를 이기지 않습니다. 빛은 그저 어둠을 드러낼 뿐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이 말은 설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기라는 말도 아닙니다. 논쟁에서 승리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은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두운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생명인지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분주합니다. 돈, 인정, 성공, 정의감마저도 결국은 썩게 됩니다. 그래서 원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돈 없이, 값없이 오라.” 생명은 계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은혜는 경쟁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보며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 자랑은 공로가 아닙니다. 상급의 크기도 아닙니다. 그날에 드러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무엇이 생명이었고, 무엇이 썩었는가, 원망하며 붙들었던 것들은 그날 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들고 말없이 견뎠던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람은 크게 말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십자가를 따라 걷습니다. 원망 대신 감사로, 시비 대신 침묵으로, 자기 주장 대신 “주님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렇게 사는 한 사람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에 작은 빛 하나가 켜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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