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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 십자가만 남기기로 한 작정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며 유독 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 단어는
‘지혜’입니다. 지혜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잠언서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에서는 유독 고린도전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 단어를 집요하게 사용하는 이유는, 고린도라는 도시가 가진 문화적 토양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논리와 언변을 높이 평가하던 도시였습니다. 무엇이 참된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는가’였고, 지혜란 곧 말을 잘하는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중심에 세웁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존중받고, 논리가 뛰어난 사람이 추앙받습니다.

그런 도시에 복음이 전해졌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기존의 사고방식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헬라인이었고, 여전히 인간의 지혜를 기준 삼아 사물을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도 같은 기준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더 말을 잘하는가?” “누가 더 지혜로운가?” “누구의 설교가 더 설득력 있는가?” 복음마저 이 기준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말솜씨로 측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파였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복음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바울은 자신의 전도를 돌아보며 일부러 강조합니다. 자신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말을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변론에 능한 사람이었고, 회당에서 날마다 성경을 풀어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말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에 의해 전해지고 무엇에 의해 믿어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다면, 그 복음은 이미 십자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헛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설득 가능한 논리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가장 저주받은 방식으로 죽으셨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눈으로 확인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했고, 헬라인은 이성과 논리를 통해 신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은 인간의 모든 기준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언제나 걸림돌이 됩니다. 설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렀을 때의 자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이 말은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자랑하던 지혜와 언변 앞에서, 자신이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말로는, 자신의 논리로는, 이 사람들을 결코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정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작정은 배타적인 지식 선언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외의 어떤 지식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설교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전도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이 말들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은근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이해하면 믿을 수 있고, 설득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바울은 이 전제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해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설득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문장은 복음 사역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전도의 목적은 사람이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말 잘함이 전도의 능력이라면, 언변은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기적이 사람을 믿게 만든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배제하셨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남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만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복음은 여전히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