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15~18)
우리는 흔히 “성경은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한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는 말이, 성경이 계시하는 본래의 뜻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방식,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대로 믿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문자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각을 성경 위에 얹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을 성경대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성경은 늘 우리 손에서 비틀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성경대로 믿게 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 앞에서는 어떤 본문도 ‘쉽다’는 느낌으로 지나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 말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장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이 말은 교리 설명이 아니라, 복음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선포된 선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과 믿음의 문제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 내 의견 차이나 신앙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 자체가 무너질 위기였습니다. 우리가 이 편지를 읽으면서도 그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너무 안전하고 무난하게 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이 말은 유대인이 본질적으로 의롭고 이방인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가지고 있던 시각, 즉 “율법을 가진 우리는 이방인과 다르다”는 전제를 그대로 끌어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전제를 무너뜨립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태어났든, 율법을 몰랐든, 그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닙니다. 율법을 삶의 질서로 살아가는 문제도 아닙니다.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율법을 ‘의의 기준’으로 세우는 태도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의로움의 잣대로 삼고, 그 행위의 정도에 따라 신앙의 높고 낮음을 가르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헌금, 예배 출석, 봉사, 성경 읽기, 기도 시간, 이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나의 의로움, 나의 신앙 상태, 나의 믿음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때입니다.
믿음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행위와 믿음은 결국 같은 줄 위에 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행위로,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러면 믿음도 인간의 업적이 됩니다. 비교가 생기고, 우열이 생기고, 경쟁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구조를 십자가 앞에서 무너뜨립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자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의가 없는 자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이 의로움임을 붙들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의는 부족함이 없고, 추가할 것도 없고, 보완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 됨에는 인간의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칫 위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이 질문은 늘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여전히 인간의 행위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신자의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삶을 의의 근거로 삼지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갑질’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왜 갑질을 합니까? 돈과 권력, 성취를 자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온 의가 하나도 없고, 가진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짓누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갑질을 안 한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조차 나의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삶을 바꾸지만, 그 삶을 내세우지 않게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복음은 인간의 자랑을 헐어버립니다. 율법은 그것을 다시 세우려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을 ‘범법’이라고 부릅니다. 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의 안에 머물면 됩니다.
율법과 믿음 사이에서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무언가 해야 안심이 되고, 기준이 있어야 믿음이 확실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불안을 끝내는 소식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셨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 앞에서 모든 입은 막히고, 모두는 같은 자리, 죄인에서 의인으로 옮겨진 자리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자유이며, 평화이며,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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