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19~21)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마음속에 반복해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믿음으로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행함에 매여 있는 걸까?”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나름대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합니다. 혹시 내가 충분히 잘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이 정도로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자기 자신을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 화를 냈던 말,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 드러나지 않은 욕심, 남몰래 품었던 시기심…. 이런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어느새 신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삶”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루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지키지 못하면 멀어집니다.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며,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을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죽게 만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은 사람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만듭니다.
현대 교회는 스스로를 “은혜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도들을 매우 섬세한 기준표 앞에 세웁니다. 이 정도는 해야 믿음이 있는 거야, 이 정도도 못 하면 신앙이 자라고 있다고 할 수 없어, 구원은 은혜지만, 성화는 네 책임이야, 이 말들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 말들이 쌓이면 성도의 삶은 점점 율법의 통치 아래로 들어갑니다.
어느 성도가 있습니다. 그는 예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실패를 겪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넘어지고,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신앙적으로도 바닥을 칩니다. 그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내가 요즘 기도를 게을리해서 그런가?” “믿음이 약해져서 하나님이 보호를 거두신 건 아닐까?”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의 해석 기준은 여전히 자기 행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결단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나는 죄 안 짓고 살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고백에 가깝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로 살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조금 더 나아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보다는 덜 화내고, 덜 미워하고, 더 선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며 죄의 유혹을 경험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인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은 실패한 성도의 탄식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선 성도의 정확한 현실 인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삽니다. 그리고 육체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적나라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느끼는 경쟁의 압박,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밀어내는 마음, 타인의 성공 앞에서 올라오는 질투,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진실을 조금 비틀고 싶은 유혹, 이 모든 것이 육체로 사는 삶의 현실입니다.
여기에 종교적 포장을 입힌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기준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정죄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구조를 십자가 앞에서 무너뜨립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은 행함의 개선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해석 기준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실패했을 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십자가 안에 있다”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죄를 보았을 때, “내가 이럴 줄 몰랐다”가 아니라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선을 행했을 때조차, “그래도 이것이 나를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삶입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기 행함으로 자신을 확인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자리는 무책임한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만 붙드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이미 완전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내가 사는 것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자유이며,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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