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말씀은 믿음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성도의 열심이나 헌신, 능력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를 염려했습니다. “너희 믿음은 지금 사람에게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있느냐.”
성도는 자기 능력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주 정반대로 이해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으면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 이러한 이해는 겉으로는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능력을 보조 수단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믿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믿음의 언어처럼 사용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할 수 있는 나’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을 보완해 주는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는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결심합니다. ‘그래, 내가 예수 안에 거해야지.’ 하지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예수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가지는 스스로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붙어 있음 자체가 가지의 능력이 아닙니다. 붙어 있도록 붙들고 있는 힘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잘해서 도달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인 선함, 실천, 공로, 신앙적 성취가 내려놓아진 자리입니다.
예수 안의 세계는 용서의 세계입니다. 그 용서는 인간의 선함이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증거된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인간에게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 앞에서는 내가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공로에 따라 대우받고 싶은 마음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 안의 세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신앙의 세계를 더 선호합니다. 그 결과, 용서를 말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인간은 본래 예수 밖에 있는 존재입니다. 밖에 버려진 존재, 불에 던져질 운명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미 이루고 계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한 체험’ 보다는 일상의 현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기적이나 표적, 강렬한 체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이 없으면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능력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 한 순간도 자기 힘으로 산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숨 쉬는 것, 오늘 하루를 견디는 것, 무엇보다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음을 믿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성도는 더 이상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능력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신뢰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지금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가서야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지금의 평안과 성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완성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현재적인 도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잘 믿어야 한다’는 부담을 스스로 짊어지게 됩니다. 그 순간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사람의 책임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나의 능력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힘이 아닙니다. 그 앞에서는 애초에 ‘나의 능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너희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사람을 비교하고,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분파가 생긴다면 그 믿음은 이미 사람의 지혜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메우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완성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성도는 이미 끝난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났고, 부활로 새 생명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믿음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내 삶을 지키려 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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