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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산상수훈 - 율법의 일점일획과 십자가의 완성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4.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17~20)

이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문장을 정직하게 읽으려 할수록, 신앙은 무거워집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지켜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더 철저한 종교인이 되라는 말인가? 이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직 사고의 중심에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벽이 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문이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
지키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이 ‘완전케 하다’는 말을 너무 쉽게 이해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 다 지켜주셨고, 그 성취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안전합니다. 물론, 그 설명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말씀이 품고 있는 깊이를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은 단순한 도덕 목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실천 가능한 규칙만 모아 놓은 것도 아닙니다. 삶의 가장 사소한 영역인 먹는 것, 씻는 것, 몸에서 나오는 것들까지 모두 율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율법을
‘실천 항목’으로 완수하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율법이 말하고자 했던 어떤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셨다는 뜻입니까?

율법은 지켜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증명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받은 첫 번째 돌판은 산 아래에서 산산이 깨졌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주어진 두 번째 돌판은 법궤 안에 감추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법을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법이 그들을 끌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법 위에는 언제나 피가 뿌려져야 했습니다. 율법은 이미 그때부터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이 법으로 살 수 없다.” “너희가 살 수 있는 길은, 너희 바깥에서 와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습니다. 그 완성은,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완벽한 모범생’이 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율법 아래 태어나셨고,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무게를 몸으로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율법에 의해 정죄받아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마침내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 율법은 생명을 주지 못함을 증명했고, 예수님은 그 불가능성을 온몸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율법의 실패가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 완전히 드러난 자리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하나님의 생명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밝히는 장치였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너희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더 낫다’는 말은 ‘더 열심히’가 아닙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지켜서 쌓는 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무너짐 속에서 드러나는 의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율법 앞에서 완전히 패배한 자에게 주어지는 의,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의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잘 지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의를 붙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산상수훈은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지키라고 주어진 규범 목록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무너뜨립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이걸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우리는 결국 대답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 고백의 자리에서, 성령의 법, 생명의 법이 우리를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그 통치가 시작된 자리,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까지, 율법의 일점일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금도 우리를 살리려 하지 않고,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너머에서, 율법이 끝난 자리에 생명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