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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빌립보서 - 이 마음을 품으라(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0.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5~11)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깊고도 놀라운 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그 구원이 오늘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흔히
“기독론의 정수”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고백은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신학적 설명보다 먼저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것도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 고백이 등장하는 문맥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빌립보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었고, 복음으로 인한 핍박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다툼과 경쟁이 있었습니다. 같은 예수를 믿고, 같은 복음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낮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음으로 서는 것,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아주 위험해 보이는 말을 덧붙입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이 말은 로마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가능한 말처럼 들립니다. 로마 사회에서 겸손은 노예의 미덕이었습니다. 강함과 승리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강해야 산다”는 문구가 어린이 태권도 차량에까지 붙어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은 패배자의 논리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복음을 성공의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겸손하면 결국 복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나를 높이기 위한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한 또 다른 자기중심성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도덕적 모범으로 삼아 흉내 내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모범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신 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일은 결코 인간의 윤리적 결단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셨던 그 마음이, 이제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의 결심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나는 원래 성격이 이래서 안 된다”, “어차피 죄인인데 어떻게 낮아지겠느냐”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고, 삶에는 연결시키지 않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경계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한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복음을 정확하게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 때문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한 말은 놀랍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스데반 안에서 반복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마음이 한 인간 안에서 현실이 된 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 충만을 병 고침, 기적, 성공, 응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성령 충만은 나를 높이는 능력이 아니라, 나를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는 능력입니다. 원수를 향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은근히 성령 충만을 피합니다. 십자가의 마음을 품게 될까 봐, 손해 보게 될까 봐, 낮아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말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곧
“주”라는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가장 실패한 인생,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무릎을 꿇습니까? 존경할 만한 사람 앞에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대상 앞에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금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얻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날 심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특별한 종교적 성취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형제 앞에서 자기를 높일 수 없습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설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천국을 미리 맛보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삶, 그 십자가 앞에 자주 무릎 꿇는 삶,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