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립보서 1:22~25)
우리는 늘 둘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살아야 할 이유와 떠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나의 유익과 다른 이의 유익 사이에서, 지금 붙들고 싶은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고백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 이 땅과 하늘 사이, 사명과 안식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말합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이 고백은 체념도 아니고, 절망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도 분명한 소망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 깊은 연합의 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 표현들은 서로 다른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다양한 설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단지 숨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그 영을 넘겨주셨습니다. 그 결과,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이기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임한 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패배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이 말은 삶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삶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오해받고, 버림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압니다. 이 땅의 삶은 잠시 머무는 여정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가 본향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떠나는 것이 훨씬 좋다. 그리스도와 더 온전히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바울은 멈춥니다. 자기에게 더 좋은 선택 앞에서 그는 다른 선택을 바라봅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말은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자신에게는 죽음이 더 유익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는 기꺼이 머무르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합니다. 작은 말 한마디, 작은 결정 하나, 내가 앞설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내가 이익을 볼 것인가, 다른 이를 살릴 것인가, 성경은 “억지로 손해를 보라”고 “의무적으로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그 선택의 방향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성향인 것입니다.
바울이 살아 있기를 택한 이유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삶이 계속되는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다시 살아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이 바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을 내가 무언가를 잘 해낸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의가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질그릇이 보배를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삶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 이유는 그가 사람을 남기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만 남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 땅의 삶과 하늘의 소망 사이에서, 나를 살리는 선택과 다른 이를 살리는 선택 사이에서 말입니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삶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삶이 누군가의 믿음을 세우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혹 오늘의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 질문 하나만 남겨 보십시오. “이 선택이 나를 드러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결국 그분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끝나는 날, 우리는 기쁨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영원히 주와 함께 있도다.” 그 소망이 오늘의 삶을 이끌고, 오늘의 선택을 빚어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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