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립보서 2:19~24)
어느 해 겨울, 한 중소기업 대표가 입원했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병세가 심각했습니다. 사무실에는 직원이 수십 명이었고, 오랜 거래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병원을 찾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은 자기 일이 바빴습니다. 누군가 연락이 왔냐고 물으면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반면 그 중 단 한 명, 평직원이었던 젊은 청년은 퇴근 후 매일 저녁 병실을 지켰습니다. 심부름을 하고, 가족들 끼니를 챙기고, 묵묵히 곁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표가 회복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 외에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한 말이 꼭 이와 같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빌 2:20).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멀리 있는 빌립보 교회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잘라 말합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21절).
이 사람들이 무심한 인간이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 나름의 사역이 있었고, 각자의 바쁨이 있었고,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바쁨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자기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날, 무리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따라왔습니다. 꽤 멀고 번거로운 길이었습니다. 그토록 열렬한 추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정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동기를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표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 표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떡이 불어나는 신기한 현상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배부름이 다시 이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무리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아야 합니까. 더 많이 헌금해야 합니까. 봉사활동을 늘려야 합니까. 전도 목표를 세워야 합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하나님의 일은 내가 무언가를 행하여 하나님을 돕는 종교적 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찾을 표적은 이것이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니라"(눅 2:12).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하늘의 아들이 왜 하필 거기에 누였습니까.
시편은 말합니다. "사람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 49:12). 깨닫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짐승의 먹이통에 뉘인 그 아기,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에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그리고 더 나아가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니, 많은 사람이 이 말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향해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러나 그 베드로도 십자가 앞에서는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인간의 결단과 의지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시고, 그 완성된 은혜를 성령으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의 실체인 것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대형 교회 목사가 자신의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만 명으로 세우실 것을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비전에 동참해 주십시오." 교인들은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했고, 전도 목표를 세웠고,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그 목사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더 분주했고, 교인들의 삶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런 사람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경고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빌 3:18~19). '신은 배'라는 말은 단순히 먹을 것을 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인 성취욕, 명예욕, 지배욕이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한다는 것은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 종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주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인가, 아니면 나의 일인가.
복음을 제대로 들은 사람들 중에 종종 불안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구역을 섬기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들의 마음에 쉼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쉼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쉬어도 되는 것인가,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안 하면 게으른 것 아닌가....
이 불안은 사실 복음을 아직 절반만 들은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는 것과 다릅니다. 그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고, 그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한 수고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동일하게 해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은 신앙과 무관한 땅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에게 같은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교회에 오고 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세상의 부요함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는 이유가 그 보장을 받기 위해서라면 목적지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인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믿고, 그 생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홉 살 아들과 함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다가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 왜 예수님이 저렇게 맞아야 해요? 하나님은 왜 자기 아들을 저렇게 내버려 뒀어요?" 어머니는 선뜻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 질문은 사실 아이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버림을 받으셨는가, 그것은 우리에게로의 버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버림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이 사건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는 행위입니다. '눈으로 보는 설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가 귀로 듣는 복음이라면, 성찬은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복음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을 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잔을 들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내 피, 새 언약의 피다." 이 말씀은 일 년에 한두 번 치르는 의례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의 전부를 담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짐을 지고, 슬픔을 함께 울고, 기쁨을 함께 웃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인 생명의 나눔이 될 때, 그것이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숫자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받은 사람들이 그 생명을 서로 나누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 끝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 2:24). 그는 무죄 석방되어 빌립보 교회를 다시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기록합니다. 바울은 끝내 빌립보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 안에서' 확신했습니다. 결과를 보장받은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성취를 담보로 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땅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을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바울 곁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화려한 직함이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걸었습니다. 결과를 보장받지 못한 채로, 땅의 것을 붙들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은 결국 그분이 하신 일,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을 알고, 믿고, 그 생명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립보서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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