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립보서 1:9~11)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대에 가야 한다." 아들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무언가 무거운 것이 얹혀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의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루어야 할 무언가를 향한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얼마나 쉽게 씁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위해 드린 기도를 천천히 읽다 보면, 사랑이란 것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고 낯선 무엇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처음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기도할 것이 없어요." 이상한 말처럼 들립니다. 믿음이 생겼으면 기도가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고백은 사실 굉장히 정직한 고백입니다. 지금껏 기도라는 형식 안에 담겨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들킨 것입니다.
좋은 대학, 건강, 사업의 번영, 자녀의 성공. 그것들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 앞에 서고 나니,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종교적 포장지를 씌운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 성경은 그것이 마귀의 유혹이었다고 말합니다. 에덴에서도 그랬고,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기도 목록 안에서도 여전히 그 유혹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감사를 드린 직후 곧바로 기도로 나아가는데, 그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이 놀랍습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소서." 빌립보 교회는 이미 사랑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연보했고, 바울의 사역을 물질로 후원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사랑을 위해 기도합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너희 사랑'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이었을 때, 심지어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방식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조건을 답니다. '네가 잘하면 사랑하겠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수 된 상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과율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이 사랑은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십자가의 언어로만 말해집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랑의 깊이를 다 안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평생 알아가야 할 넓이이고, 죽는 날까지 발굴해야 할 깊이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다툼이 생기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날 때, 바울이 다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직 그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투고,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기도합니다. 각주를 보면 '같지 않은 것을 분별하라'는 뜻이고, 헬라어 원문은 '시험하여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왜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맥에 등장할까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랑도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아이의 영혼보다 스펙을 먼저 챙기는 사랑,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나라를 적으로 삼는 사랑,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 사랑,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진짜 사랑과는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예언도, 귀신을 쫓는 것도,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기준 앞에 서면,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많은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행위의 크기나 열심이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했다고 아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입니다. 행위의 목록이 아니라 관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성과가 아니라 그분과의 연결, 곧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날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기다린 그리스도의 날이 왜 심판의 날이 됩니까?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자신들의 민족적 선민의식을 채워줄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그 기대와 달랐고,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실은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사업을 번창하게 해 줄 예수님, 내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줄 예수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줄 예수님, 그날이 되었을 때, 우리가 기다린 예수님과 실제로 오시는 예수님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기도합니다. 6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 이 소망의 근거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새번역은 더 명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 열매를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짜내려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맺은 열매에는 인간의 공로가 섞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붙어 있어서 맺힌 열매는 온전히 나무의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더 넓은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려 하십니다. 그 계획 안에서 우리는 예정을 입어 그분의 기업이 되었고, 이것이 그분의 영광의 찬송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성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죄인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드러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터키에 사는 자매의 남편이 42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불신자 가정인 친정 오빠가 와 있다가 그 말을 들었고, 그 내용을 담은 영상을 친정어머니에게 보냈습니다. 42살에 남편을 잃은 딸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 그 이유가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으니, 어쩌면 그것이 복음으로 가는 문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자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이루신 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한 가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 너무 쉽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짜가 되려면, 우리 안에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보여야 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래서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사랑을 더 깊이 알고,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날까지 이르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탁월함이 아니라 우리의 의존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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