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립보서 3:1~2)
어느 날 오후, 한 코미디언이 무대 뒤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방금 전까지 그의 농담에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막이 내리자마자 그는 분장실 구석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군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어요. 남을 웃기는 것이 제 직업이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고역입니다."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정작 자신은 기쁘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의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쇠사슬이 그의 손목을 묶고 있습니다. 낮이면 로마
군병이 그를 지키고, 밤이면 차가운 바닥이 그의 잠자리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처지에서 '기뻐하라'는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는 편지를 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공연처럼 예배를 연출합니다. 조명을 조절하고, 음악의 박자를 올리고, 설교자는 청중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쁨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집니다. 코미디언의 웃음처럼, 막이
내리면 끝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의 원천은 다릅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수십 번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감옥이라는 공간적 제약이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어느 교회의 금요 성경 공부 시간에 처음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 집사님의 자녀 친구 어머니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어린 양에 관한 공부를 마치고 그분이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어린 양이 무엇인가요?"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그날 저녁의 문을 열었습니다. 목사님은 창세기 3장의 가죽 옷, 출애굽의 어린 양의 피, 세례 요한의 선언까지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풀어주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증언하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요?" 또 다른 질문이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죄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 즉 세상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앞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시골 목수가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싫어서 욱하는 마음에 밀쳐버렸더니 그만 그 분이
죽고 말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그분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순간, 사도행전 2장 37절의 장면이 겹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이 했던 그 질문과 똑같았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펴서 38~39절을 읽어드렸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방금 한 질문이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목사님은 그분의 이름도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분이 진정으로 주 안에 들어오셨다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기쁨이 그분 안에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만들어주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한 기쁨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기쁨을 위협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들을 가리켜 바울은 세 가지 표현을 씁니다.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일을
하는 자들'. 이 마지막 표현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강렬한
비판입니다.
할례는 원래 아브라함 때 시작된 언약의 표였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은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뒤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직전 13년,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약속은 네 육체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할례는 바로 그 고백의 표였습니다. '나의 혈과 육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가능하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 그의 나이는 100세에 가까웠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그 해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비웃음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온갖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복음의 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들어온 자들은 이 할례를 공로로 바꾸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의 표를 행위의 공로로 바꾼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례를 자랑하며 율법을 지킨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전하는 자들을 잡아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주변의 '개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경고는 1세기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거기에 무언가를 더 보태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이 범주에 해당합니다.
더 많이 기도해야, 더 많이 헌금해야, 더 많은 봉사를 해야, 어떤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해야, 특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신학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옷을 입든, 번영신학의 옷을 입든, 신비주의나 금욕주의의 옷을 입든 본질은 같습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를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로
바꾸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그 첫째가 개들입니다. 반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의의 세마포를 입혀주셨는데, 거기에 자신의
공적을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빨아내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금요일 밤 그 낯선 분의 눈물을 생각해 봅니다. 어찌할꼬, 라는 그 질문이 복음의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는 자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요한계시록 22:17) 값없이, 이것이 핵심입니다. 공로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할례도 아닙니다. 오직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쇠사슬이 그의 몸을 묶을 수는 있어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코미디언은 관객을 웃기면서 정작 자신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쇠사슬 속에서도 노래합니다. 이 역설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자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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