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빌립보서

빌립보서(18) -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8.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4~9)

어떤 사람이 평생 모은 보물을 창고 가득 쌓아두고 살았습니다. 그 창고 안에는 그가 공들여 얻은 것들이 빼곡했습니다. 명문 집안의 혈통을 증명하는 족보, 스승에게 받은 수료증과 표창장들, 수십 년간 흘린 땀으로 쌓아올린 공로의 기록들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창고 문을 열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이 있는 한 나는 안전하다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창고에 불이 났습니다. 그는 화염 속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맨몸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 창고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창고를 지키느라 정작 진짜 집 쪽으로는 한 번도 걸어가 보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그와 같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력서를 꺼내 듭니다.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순혈 유대인,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이것은 단순한 가문 자랑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 목록은 최고의 영적 자격증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명문대 수석 졸업에 국가고시 수석 합격, 그것도 대를 이어 내려온 명문가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타고났고, 타고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후천적으로도 갈고 닦아 완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이력서를 꺼내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 이 말은 쉽게 납득이 안됩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버렸다는 말이라면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버렸다고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좋은 것들입니다.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도 칭송받을 만한 것들입니다. 왜 그것들이 버려야 할 것이 됩습니까?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가야 합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손에 쥐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단의 괴수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예수 믿는 자들이 집에서 끌려 나와 감옥에 던져질 때도, 사울의 마음속에는 의심 한 점이 없었습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길 위에서 빛이 그를 에워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의 세계는 무너졌습니다. 그가 적으로 알았던 예수가 부활하여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핍박한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믿었던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을 거스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이 먼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한 내면의 눈이 뜨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평생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의 정체를 새롭게 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율법을 그토록 열심히 지킨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 인간에게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통해 자기 의로움을 쌓아 올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처럼 보였지만 그 중심에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결국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으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힘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기준이 주어지면 그 기준으로 자신을 꾸미고 남과 비교하여 자기 우월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율법을 가진 자는 율법으로, 교양을 가진 자는 교양으로, 도덕을 가진 자는 도덕으로 자기 의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의의 성채 안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정죄합니다. 그 성채가 크고 견고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올 문은 더욱 좁아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도 이 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체면과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문화 위에 서 있었습니다. 좋은 학교, 안정된 직장, 반듯한 가정,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 만큼의 삶, 이것들을 갖추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무언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경제적 성공이라는 기준이 훨씬 강하게 덧씌워졌습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돈이 없으면 아무리 성실해도 실패한 삶이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교회로 걸어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교회라는 공간에서 이루어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은 아닌가요? 건강, 성공, 자녀의 출세, 사업의 번창, 이것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그 믿음의 방향은 처음부터 어긋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치의 전복입니다. 세상이 귀하다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이 세상 눈에는 금메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자랑스러운 것들을 배설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스스로 쌓은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의, 내가 만든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 내가 도달한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의로움입니다.

어떤 젊은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성실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성경을 암송했으며, 선배들에게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나이 든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 성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구원받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신학생은 속으로 의아했습니다. 저렇게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다니,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신학생이 목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말의 깊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성도가 한 말은 불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가장 깊은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 그리스도가 하신 것의 크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때, 그것은 상실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의 언어입니다.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발걸음처럼, 증명해야 할 것이 없어진 사람의 눈빛처럼, 나의 혈통도, 나의 노력도, 나의 도덕적 성취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히려 그 짐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의 의미를 맛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의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 내가 도달해야 하는 어딘가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음,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해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다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이 질문은 예배가 끝난 뒤에도 우리 안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