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0~12 )
다메섹으로 가는 길은 먼지가 자욱했습니다. 사울은 말 위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대제사장의 공문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보다 더 의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사울은 땅에 고꾸라졌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 대답은 그의 인생 전체를 뒤집어 놓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그 자리에서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먼저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지우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먼저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잡힌바 됨"의 실체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는 흔히 신앙을 선택의 언어로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내가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그 반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방향의 차이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어가 되느냐, 그리스도가 주어가 되느냐, 이것이 복음과 종교를 가르는 분기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사로잡혀 삽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에 붙들려 있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그것을 날카롭게 진단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산다고 묘사합니다. 얼핏 보면 그것은 자유로운 삶처럼 보입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자유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 포로 상태라고 말합니다. 욕구와 욕망의 포로, 더 강한 권세에 붙들린 노예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이 원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같은 현상을 "모방 욕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옆집이 수입차를 뽑으면 나도 갖고 싶어지고, 친구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나도 가고 싶어집니다. 배가 고플 때는 밥 한 그릇이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배가 부르고 나면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는다. 욕구가 채워지면 욕망이 자랍키다.
이 철학자들은 그 구조를 예리하게 포착했지만, 한 가지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 즉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사로잡히기 전, 그는 자신이 완전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 그가 가장 선하다고 여긴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일이었음을, 그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인간의 가장 무서운 모습입니다. 자신이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확신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와 같습니다. 항해사는 자신이 정확히 항로를 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계기판을 읽고, 속도를 조절하고, 열심히 키를 잡습니다. 그러나 나침반이 거짓을 가리키고 있다면, 열심히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멀어집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 편에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배를 돌려세우는 것은 항해사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외부에서 더 강한 손이 개입해야 합니다.
신명기 33장 27절은 그 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영원하신 팔입니다. 1980년대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만화영화 '가제트 형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머리에서 헬리콥터 날개가 튀어나오고, 팔이 무한정 늘어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는 로봇 형사입니다. 그 팔은 상상의 산물이지만, 하나님의 팔은 실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로잡혀 있는 자를 건져내기에 충분히 강합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은 시편 68편을 인용하며 말합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승리한 장군은 원래 전리품을 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시고도 선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로잡혔던 자들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이 역설이 복음의 심장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붙들려 있던 우리를 그가 사로잡아 내시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는 것들이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모입니다. 그는 10절에서 세 가지를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하고,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했습니다.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말은 충격적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번영을 약속하고, 성공을 보장하고,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내밉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죽으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에게 "저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부모가 기꺼이 그 길을 허락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성공한다면 환영하겠지만, 예수 믿고 죽겠다는데 박수를 보낼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미 하늘에 앉혀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함께 일으켜졌고, 하늘에 함께 앉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에서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것은 마치 전쟁이 이미 결정적으로 승리했지만, 전선 곳곳에서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완전한 현현을 향해 우리는 아직 달려가고 있습니다. 잡힌바 된 자로서, 그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성공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게 됩니다. 인생이 통째로 뒤집히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 자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오랫동안 종교적인 열심 속에서 자신을 치장해 왔는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손이 느껴집니다. 영원 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찾아내시는 그 손이 십자가로 다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은 이제 방향이 바뀝니다. 자신의 유익을 향해 달려가던 발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 그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사로잡힌 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달려가노라"고 할 때의 그 달림인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자아실현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혀 삶 전체가 전복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 전복은 결코 비극이 아닙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노예에서 아들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잡고 있는 한, 그 달림에는 끝이 있고, 그 끝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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