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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빌립보서

빌립보서(20) -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립보서 3:12~16)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는 확신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확신을 넘어 광신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는 빠르게, 힘차게, 확신을 품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그는 붙잡혔습니다.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향하여 빛이 임하였고, 그 빛 앞에서 그는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었습니다.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사울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아니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달려가던 길이 사망의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돌아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신이 너무 강했기에, 오직 예수님이 직접 그를 잡으셔야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바울이 쓴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붙잡힘을 당한 자. 그것이 바울 자신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이민자로 오래 살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지 묻게 되는 때가 옵니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그다음에는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또 그다음에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멈추어 보면 자신이 무엇을 향해 달렸는지 알 수 없어집니다. 목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처음의 목표가 이미 바뀌어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달린다고 믿었지만, 실은 하나님을 향해 오시는 그 분을 막아서는 길을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붙잡힌 후,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자신의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그것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내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교제란 단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상대방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예수님과 그런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우리를 향해 달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붙잡으셨습니다. 그 부르심 자체가 이미 상입니다. 세상의 어떤 왕이 자신의 신하를 이런 목적으로 부르십니까? 함께 교제하기 위하여, 함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함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왜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반응할까요? 부르심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느 의사가 진찰실에 앉아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옆에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같은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사진이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의사는 그 사진 안에서 병의 위치와 크기와 진행 상태를 읽어냅니다. 그러나 그 옆 사람에게 그 사진은 그저 뼈의 흑백 이미지일 뿐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압니다. 그것은 지성의 차이가 아니라 부르심의 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이 세상의 조건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기에,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한 말은 단순한 결단의 선언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새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나오던 그 기적을 기억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에만 머물러 있으면 지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놓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것이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사 65:17).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왔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성취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달려갔던 그 열심도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이룬 것들도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에 머물면 앞에 있는 것을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15절과 16절에는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나옵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이룬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은사가 나타나니 자신이 대단한 자인 줄 아는 사람들, 영적인 지식을 얻었다고 성경도 예수도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말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하나님이 더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이미 다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알기 위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를 한 번 보았다고 해서 바다를 다 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넓이와 깊이를 한 번의 방문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평생을 달려가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달려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상이 무엇인지 이 내용을 통해 살펴본 것들을 모아보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임을 알게 되는 것,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는 것,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부르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한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분을 향하여 달렸습니다. 이미 붙잡혔지만, 그 붙잡으신 분을 더 알기 위하여 달렸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 안에 있는 영광의 깊이를 더 맛보기 위하여 달렸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상을 향한 달음박질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이들이 가는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