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립보서 3:17~19)
어느 날 한 성도가 이런 고백을 털어놓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이라 여겼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은 늘 하나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예배당 문을 나서지만, 막상 열심히 살다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이 결코 배설물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간절히 붙잡으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버림받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물음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은 이 땅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삶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세우려 한 시도, 곧 자기 공로를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 한 그 교만한 시도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섭리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땀을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를 불한당이라 불렀습니다.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믿는 자는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성도는 하루 열한 시간씩 육체노동을 시작했다면서, 몸은 고단하지만 일하는 중에 오히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떠오르니 기쁘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사는 한 썩는 양식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골로새서 3장은 그 답을 아주 구체적인 자리에서 찾습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 일상의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고 명합니다. 특히 종들에 관한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당시 종은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말하는 도구였고,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가 도망치면 추노꾼이 잡아왔듯, 그들에게 주인의 눈을 피해 대충 일하는 것은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 종은 그렇게 살지 말라. 눈가림으로 살지 말고, 주께 하듯 성실하게 하라."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사도들도 이 사회 제도를 당장 뒤엎으라 외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공동체 안에서는 혁명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과 주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 시대에 이보다 더 근본적인 변혁은 없었습니다. 복음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본받으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유익하다 여겼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그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는 말입니다. 모범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바울은 그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눈물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는 분노로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으로 경고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빌립보 교회 밖의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자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이 "개들을 삼가라,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한 바로 그 사람들, 즉 율법을 따라 할례를 강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자입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나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덜어내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들리심으로 영생을 주시고(3:15), 참된 진리를 알게 하시고(8:28), 모든 자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것(12:32)이 모두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란 이 "다 이루심"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거기서 무언가를 빼려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은 말합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어떤 행위도, 어떤 결단도, 어떤 열심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였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복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복이었습니다(롬 4:7).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부인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자기 부인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부인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불교가 되고 금욕주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지신 그 십자가에 성령을 통해 우리를 함께 못 박으셔서, 그분이 이끌어 가시는 것이 참된 자기 부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성화조차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일이며,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원수는 율법주의만이 아닙니다. 자기 의지와 결단을 신앙의 중심에 놓는 것, 믿음 자체를 또 하나의 공로로 만드는 믿음 만능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이 모두가 십자가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시도이며,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자기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것도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결국 배를 신으로 삼는 것, 곧 자기 욕망을 섬기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어떤 이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고 한 말, 어느 목사가 "구원이 예수님 외에도 있다"고 한 말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단순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그 피를 증거하는 분이 은혜의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자신의 모든 의로운 행위가 배설물로 보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렇게 십자가만을 붙든 자들에게서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더 희생적인 모습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은 한결같습니다. "내가 죽기까지 충성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고전 15:10).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십자가의 친구가 걷는 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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