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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빌립보서

빌립보서(23) - 주 안에 서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빌립보서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작은 단어에 눈이 멈춥니다. "
그러므로" 접속사 하나가 이 편지의 앞뒤를 꿰뚫습니다. 바울은 방금 전 장에서 하늘의 시민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는, 그 눈부신 약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러므로"라고 말합니다. 그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편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빌립보 교인들을 부르는 방식입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은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살아온 삶이 응축된 고백입니다. 바울은 지중해를 건너다녔습니다. 채찍에 맞고, 돌에 맞고, 파선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길에서 그가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그에게 면류관은 황금으로 만든 왕관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 그 살아있는 얼굴들이 그의 면류관이었습니다.

한 노선교사가 임종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물었습니다.
"평생 가장 보람 있던 일이 무엇이었어요?" 그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을 때 눈빛이 달라지던 그 사람들의 얼굴이요."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함께 설 수 있는 그 얼굴들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에서 바울은 갑자기 두 사람의 이름을 꺼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한때 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힘쓰던 동역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금이 가 있습니다. 바울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편지에 이름을 넣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성경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래 함께 일하다 보면 생기는 그 미묘한 균열들입니다. 처음에는 같은 열정으로 시작했지만 언젠가부터 서로의 방식이 부딪히고, 감정이 쌓이고, 말이 비틀리기 시작하는 그 과정입니다.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방향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주고받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고, 함께 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사이에 생긴 상처가 가장 아픕니다. 남보다 먼 거리가 되어버린 그 간격이 가장 쓸쓸합니다.

바울이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
주 안에 서라." 그리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주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닙니다.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인간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어떤 심리상담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화해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진심 어린 사과, 충분한 시간,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변하려는 의지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주 안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작은 다툼들을 다르게 봅니다. 영원의 시간표 위에 올려놓고 보면,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자존심의 크기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3절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한 마디가 앞선 모든 말의 무게를 바꿉니다.
생명책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원하건대 당신이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백성을 위해 중보하는 그 절박함입니다. 그 책은 생명을 담은 명부인 것입니다.

다윗도, 다니엘도, 예수님도 그 책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적을 행하고 돌아와 기뻐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능력이나 성과가 아니라, 이름이 기록된 것 자체가 기쁨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책의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 그 책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어린 양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이상한 위로가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툽니다. 아직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위안이 된다고 바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우리에게 솔직하게 말을 겁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도 다툽니다. 복음을 함께 전하던 사람들 사이에도 금이 갑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이 땅 위에, 이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심히 다투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가짜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 낮은 몸 안에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이름 없는 한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이 여인들을 도우라." 다툼이 있는 그 자리에 혼자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가서 함께 있어 주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유다서는 이 돕는 역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두려움 속에서도 긍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안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식입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영원한 세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억울함도, 오해도, 상처도 다 지나간 것이 됩니다. 그 세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여기서도 그 기준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천국에서 함께 살게 될 사람들이라면, 지금 한 마음을 품으려 애쓰는 것이 맞습니다. 같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 땅에서도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서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우리를 흠 없이 세우시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언약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함께 일하시며, 기어이 우리를 그 영광 앞에 세우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도 주 안에 섭니다. 다투면서도, 연약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채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립보서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