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립보서 4:4~5)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를 켰습니다. 교통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날 아나운서가 말했습니다. "오늘은 도로 상황이 매우 원활합니다." 그는 기분 좋게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공사 때문에 막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핸들을 두드리고, 혼잣말로 투덜거렸습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도로가 그를 지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지치게 했습니다. 우리의 짜증과 분노와 원망은 대부분 이 한 가지 뿌리에서 자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는 또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같은 명령을 남겼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능은 단순합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힘을 갖고 싶어 합니다. 돈을 모으고 권력을 쥐면 조금 더 내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신을 찾게 됩니다. 정성을 바쳐 신의 힘을 빌려 내 소원을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모든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뜻을 들어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무너뜨리고 주님의 뜻을 우리 안에 이루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재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롬 11:36).
이것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편이 어떠하든, 세상이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아도, 주님의 뜻대로 되고 있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가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이 편지는 감옥에서 쓰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갇혔고, 언제 사형 선고가 내려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도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는 핍박이 들어왔고, 내부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 지도자가 다투고 있었으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교인들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뻐하라, 다시, 기뻐하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황을 억지로 긍정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의 근거는 구체적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빌 4:3).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 그 복음에 협력한 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기서부터 오실 구원자를 기다리며, 그분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을 약속받았습니다(빌 3:20~21). 쇠사슬에 묶인 손목으로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속이 사슬보다 더 실재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이 전해질 때의 일입니다. 바울은 그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살전 1:5). 우리는 이 말에서 흔히 놀라운 표적과 기적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곧바로 설명하는 그 능력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환난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난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 속에서 기쁨이 넘쳤습리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선교사 C. T. 스터드는 명문가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리켓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고 중국으로, 인도로, 마침내 아프리카 오지로 들어갔습니다. 건강이 무너지고 동료들마저 그를 떠났을 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 이 고난이 내 기쁨을 증명해 준다." 그 기쁨은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난을 통과하면서 더 깊어진 기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그 기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 5:41). 매를 맞고 기뻐하며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정신적 이상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기쁨을 그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쁨의 명령 바로 다음에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관용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관용은 어리석음처럼 보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관용을 베풀면 뒤처집니다. 성과를 내야 살아남는 구조에서 너그러움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성과를 이루어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 스트레스를 쾌락으로 풀려다 더 깊은 공허함에 빠집니다. 이 악순환의 구조에서는 참된 관용이 자랄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관용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서 관용이 나옵니다. 로마서 1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오래전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는 한 농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쓰던 농기구들을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아까울 것도 없었습니다. 도시에 가면 쓸 일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움켜쥐지 않기에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기에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 자신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너머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기쁨이 십자가를 견디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예수님 홀로 앉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도 함께 앉히셨습니다(엡 1~2장).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어떻게 작은 것 하나에 원한을 품고 살겠습니까?
주 안에서의 기쁨은 기분이 아닙니다. 감정의 파도를 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약속에 뿌리를 내린 삶입니다. 빌립보서 전체에 걸쳐 바울이 기뻐하는 장면들을 보십시오. 겉치레로든 진심으로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기뻐합니다(빌 1:18). 성도들이 서로를 낫게 여기며 겸손히 섬기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빌 2:4).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빌 2:13). 병에서 회복된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는 것으로 기뻐합니다(빌 2:29). 이 모든 기쁨의 공통분모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인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의 내용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의, 그 의로 인해 하나님과 이웃과 회복된 관계 안에서 누리는 평강, 그 평강에서 흘러나오는 기쁨, 이 세 가지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을 통해 믿는 사람은, 오늘 도로가 막혀도, 오늘 누군가 나를 배신해도, 오늘 몸이 아프고 형편이 어려워도, 그 너머에 있는 실재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 넘쳐흘러 관용이 되고, 그 관용이 있는 곳에 의와 평강이 깃듭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기뻐하라고 썼을 때, 그것은 강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증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 기쁨 안에 있다. 너희도 여기로 오라."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이미 그 기쁨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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