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의미가 명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모든 조항을 완벽하게 지키셨고,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과 개혁신학의 거장들이 한목소리로 설명하는 이 해석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이 틀 안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깊이 읽으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십계명만이 아니었습니다. 몽정한 남자의 격리 규정, 배설물 처리 방법, 이자 취득 금지, 월경 후 정결예식 등 수백 가지가 넘는 세세한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다 지키셨다는 건가? 아니, 애초에 '다 지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지켜서 우리에게 의를 주신 거라면,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도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려 했지 않았던가?
마태복음 5장 20절의 한 단어가 이 질문의 열쇠였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더 낫다'로 번역된 헬라어 '페리슈오'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바리새인의 의와 종류가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의를 쌓아갔습니다. 만약 예수님도 그렇게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고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것은 같은 차원의 의인 것입니다. 단지 완성도가 높을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의라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첫 번째 돌판은 산 아래로 내려오기도 전에 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본 모세가 돌판을 내동댕이쳤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단순한 모세의 분노로만 볼 수 없습니다. 첫 돌판의 파괴는 하나의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율법을 지켜낼 수 없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처음부터 폭로된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은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 후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법궤 속에 감추어졌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법궤라는 상자 안에 넣어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매년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이 법궤 위를 흠 없는 어린양의 피로 흠뻑 적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이 피로 덮여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이 은혜로 가려져야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할 때, 법궤는 항상 맨 앞에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가 먼저 나갔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입니다. 백성이 율법을 장악하여 지켜서 강을 건넌 것이 아닙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물에 들어가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백성이 성벽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법궤를 앞세워 나팔을 불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은혜가 앞서 나가고, 백성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법이 백성을 이끌었지, 백성이 법을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분명하다'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이 확인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존재는 그 누구라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예수님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실 수 없었습니다. 아니, 지켜내시면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옛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성전인 육체는 반드시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져야 했습니다. 그래야 새 성전이, 부활의 몸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은 우리 안에 두 개의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죄의 법, 사망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법, 성령의 법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하면 안 돼." 말씀을 명령과 규칙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으로 의로움을 얻으려는 DNA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도 이것은 계속됩니다. 한쪽에서는 "지켜야 해, 열심히 해야 해"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이 사망의 법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너는 지킬 수 없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입니다.
솔직히 전자가 더 매력적입니다. 무언가를 해내면 보람도 느끼고, 성취감도 맛보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습니다. "저 사람 정말 신실하네, 경건하네" 하는 칭찬을 듣습니다. 반면 후자를 따르는 사람은 어떻게 보일까요? "저 사람 요즘 왜 저래? 예전에는 열심히 하더니." 불성실해 보이고, 나태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사망의 법 쪽으로 끌려갑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는다"고 고백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죽은 것 같은데 다음 날 또 살아나 있고, 십 분 후에 또 살아나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의로움을 추구하려는 육신의 습관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법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이제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일까요? 그것도 맞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은 사흘 만에 새 생명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육신 안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의 육도 부정당하고, 깨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래야 성령이 살려내신 새 사람이 일어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우리가 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법이 우리를 장악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이 구절을 보통 이렇게 이해합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율법은 절대 없어지지 않으니까 다 지켜야 해." 하지만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 즉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동시에 품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옛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천지가 '없어져야' 율법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일점'은 히브리 알파벳 중 가장 작은 글자 '요드'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상징입니다. '일획'은 '뿔'을 의미하는데, 구약에서 뿔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누가복음 1:69). 가장 작은 자로 오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가장 작은 자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해내십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충격적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십자가까지의 전 생애가 저주의 삶이었습니다. 율법이 약속한 복은 하나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배척받고, 오해받고,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복받는 삶입니까, 저주받는 삶입니까?
사도 바울의 이력서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진짜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내세웠습니까?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으니"(고린도후서 11:23).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내용을 이력서에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일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랑으로 내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열한 고난들을 자세히 보면, 신명기 28장의 저주 목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바울은 이것을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저주의 언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명기 28장 앞부분의 축복 말씀들을 냉장고에 붙여놓습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머리가 될 것이요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며."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오해입니다. 이 말씀들은 율법을 지키면 이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명기 28장 전체의 맥락은 "너희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따라서 저주를 경험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 저주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먼저 가셨고, 우리도 그 길을 갑니다. 냉장고에 축복 말씀을 붙이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다가 지옥 가겠습니다." 무서운 역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삶을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경건하고 싶고, 깨끗하고 싶고, 거룩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그분이 미워하시는 죄를 우리도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열망이 "내가 지켜낼 수 있어"라는 확신으로 이어지면 위험합니다. 그것은 다시 사망의 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짜 경건은 이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난가?"라며 절망합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힘은 "내가 더 노력하면 돼"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붙드신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법에 끌려가는 삶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선한 일을 하고, 기도하고, 섬깁니다. 하지만 내면의 동력이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했어"라는 자부심이 쌓이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하셨네"라는 감사가 쌓이는 삶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어떤 날은 "맞아, 나는 은혜로 사는 거야" 하다가도, 다음 날은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며 율법주의로 돌아갑니다. 어떤 날은 넉넉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도, 다음 순간 "나는 이렇게 희생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래?"라며 분노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바울도 그랬고, 모든 성도가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두 법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싸움의 방향입니다. 점점 더 은혜를 깨닫는 쪽으로 가는가, 아니면 점점 더 자기 의로 돌아가는가 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끌고 가시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 내가 작아지고, 그분이 커지는 것, 내 공로가 무너지고, 그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 혼자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도 완성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요?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하시고 이끄실 때, 우리가 지켜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죽고 성령께서 살리실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주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율법은 지켜내야 할 체크리스트가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입니다. "너는 할 수 없어, 은혜가 필요해"라고 매일 우리에게 말하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게 됩니다.
"천지가 없어져야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 옛 습관, 옛 자신감이 무너질 때, 새 사람이 일어섭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십니다. 너무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매일 조금씩 죽고, 매일 조금씩 은혜를 깨닫고, 매일 조금씩 예수님께 끌려가면 됩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을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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