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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산상수훈 - 더 이상 도륙하지 말라, 완성된 것을 완성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8.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1~26)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집을 지었습니다. 설계도를 직접 그렸고, 기초를 놓았고, 벽을 세웠고, 지붕을 얹었습니다. 마지막 못을 박던 날, 그는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다 됐다. 이제 여기서 살아라." 그런데 아들은 이튿날 아침부터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아버지가 벽을 잘못 세운 것 같아서요. 제가 좀 더 보강해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 침묵 안에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완성된 집을 아들이 믿지 못하는 슬픔이었습니다.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심장부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스스로 율법의 완성자임을 선언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으신 말,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는 단순한 임종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 가리켜온 방향의 종착지, 그 완성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선언하신 바로 그 다음 대목에서, 예수님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를 꺼내 드십니다. 완성했다고 해 놓고 왜 다시 율법 조항을 꺼내는 것일까? 이 배치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의 완성자 자격으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직접 해설하신 하나님 사랑의 계명들 이후 설명 없이 남겨진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직접 풀어내고 계십니다. 첫 번째 돌판은 심판이었고, 두 번째 돌판은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산 위에서 그 두 번째 돌판의 내용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계명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하나님 스스로가 모순에 빠진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진멸을 명하셨습니다. 아이 성을 치라 하셨고, 아말렉을 멸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같은 의미의 금지라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명을 파하는 분이 됩니다.

여기서 원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의 히브리어 '라짜흐'는, 예수님이 헬라어로 받아 '포뉴어'로 설명하십니다. 이 단어는 본래 제사 현장에서 쓰이던 말입니다. 짐승을 도륙하고, 제물을 살육하는 행위,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살육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계명의 진의는 이것입니다. 반복하여 제물을 도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살륙죄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반복하는 그 행위 자체가 살륙죄라는 것입니다.

에스겔도 같은 말을 합니다. 제단에서 끊임없이 드려지는 제사를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왜 그런가요? 제사는 본래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영원하고 단번에 드려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그림이 가리키는 실체를 잊고, 그림 자체에 매달렸습니다. 매일 아침저녁 드리는 상번제, 속죄일의 대제사, 화목제, 속건제가 쌓여갈수록, 그들은 점점 더 영단번에 완성된 그 죽음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자꾸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한 번의 죽음으로는 부족하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반복하여 죽이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 도륙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선악과 사건의 핵심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스스로 소화하고 장악하려 한, 율법적 인간의 탄생이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먹어버린 것, 그것이 창조주를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즉시 무죄한 짐승을 도륙하여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우셨습니다. 인간이 창조주를 죽이자, 하나님이 무죄한 짐승을 죽여 인간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시 모형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이 구도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없음', '헛됨'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마땅히 죽기 위해 이 땅에 온 형제입니다. 아벨은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증언합니다. 아벨은 알았습니다. 내 밖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났음을, 그 죽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제사임을 말입니다.

반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선언된 저주의 산물, 율법적 행위의 열매를 하나님께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자, 가인은 심히 분노하여 형제를 죽였습니다. 자기 제사가 부정되는 것은 자신이 부정되는 것이기에, 그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죽음 이후, 셋이 태어납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주어진 씨"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이자 예수가 우리를 품어 안고 교회로 탄생시키는 그 구원의 이야기가,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의 이야기 안에 이미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화내지 말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전통에서 형제는 구렁텅이에 빠진 다른 이를 끄집어낼 능력이 있는 자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형제는 누구입니까.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 형제를 가리켜
'라가', 곧 텅 빈 자, 밥통이라 부르는 자는 공회에 잡힙니다. 공회, 곧 산헤드린은 율법으로 굳어져 함께 뭉친 자들의 모임입니다. 율법주의에 깊이 박힌 자들은 은혜를 전하는 형제가 하는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노력과 열심을 부정하는 그 말이 골빈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들은 논리가 있었고 근거가 있었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형제를 죽였습니다. 그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부르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지옥,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던 그 골짜기는, 제사에서 나온 짐승의 배설물과 오물, 그리고 처형된 시체들이 쌓여 365일 불이 꺼지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를 가리켜
"배설물"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자기 의와 종교적 성취가 영원히 타오르는 곳, 그것이 지옥입니다.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제물로 바치는 삶,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가인과 다릅니까,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떤 성도를 상상해보십시오. 그는 오늘도 열심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헌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불안이 찾아옵니다.

이번 주에 화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거짓말도 한 번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제가 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더 잘하겠습니다. 이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기도 안에 담긴 전제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이런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의 눈물과 뉘우침이 더해져야 용서가 완성됩니다.

그 전제가 문제입니다. 그 전제가 예수를 다시 제단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단번에 완성하셨다는 복음을 우리가 끝내 믿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완성을 반복하여 요청하는 사람이 됩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 뒤에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다'는 율법의 불안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살육입니다. 도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 이것은 예배 전에 다툰 사람과 화해하고 오라는 실천 지침이 아닙니다. 번제단에는 오직 예수라는 제물만 올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형제와 원수 된 채, 즉 예수를 못 알아보고 분노한 채 제단에 나아온다면, 아무리 정성스러운 종교 행위라도 하나님 앞에 가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아들의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하나, 그것만이 번제단에 올려져야 할 제물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그리고 곧바로 선언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내가 이미 그렇게 했으니 더 죽이지 마라. 살육하지 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느냐?" 우리는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자입니다. 그 죽은 자를 찾아오신 분이 예수시고, 그 사랑을 받아 살아난 우리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의 손을 결코 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의 손이 닿을 수 있습니다. 그 손에 들려 살아난 자가 어찌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원수로 취급하여 죽인 그분의 죽음으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앎 자체가 이미 사랑의 시작입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다 지어놓은 집에 아들이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묻습니다.
'왜 왔느냐.' 아들은 말합니다. '더 보강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순간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내가 수십 년을 지었는데, 네가 믿지 못하는구나." 예수님의 눈물이 그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망치를 들고 서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더 이상 도륙하지 말라. 이미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