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15~20)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오래도록 성경읃 묵상하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시며, 단 하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조심스러웠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는 과연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놓치지 말라는데, 나는 늘 부족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한 협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복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빛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두어진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촛불은 스스로 타오르지 않습니다. 불이 붙여질 때에만 빛을 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은 우리가 열심히 쌓아 올린 착한 행실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두어진 분,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말은, 빛을 더 밝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켜진 빛을 숨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 빛은 우리가 연습해서 얻은 성품도 아닙니다. 그 빛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아들인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쉽게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착한 행실’은 도덕적 선행이나 윤리적 모범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에 사용된 단어는 절대적 선을 의미하는 아가토스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칼로스입니다. 이 말은 그 행실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착한 그 일’이란 내가 해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행해 놓으신 그 일입니다. 곧, 내 안에 아들이 거하시고 그 아들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와, 저 사람 참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 안에서 일하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완성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러니 우리도 더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성’은 율법의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부정한 자들과 식탁에 앉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켜서 완성하신 분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와 심판을 몸으로 받아내심으로 완성하신 분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다 지키면 살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결국 사망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길의 끝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심판을 스스로 떠안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완성’인 것입니다.
말씀을 규례로 읽을 때, 우리는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로 읽히지 않을 때, 그 말씀은 반드시 명령과 규칙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명령과 규칙은 항상 우리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지켰는가, 지키지 못했는가, 성장했는가, 정체되었는가, 성숙했는가, 부족한가, 이 비교는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은 곧 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짐은 우리 삶을 메마르게 만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과 저주는 단지 미래의 형벌이 아니라 말씀이 빠진 현재의 삶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은 광야가 됩니다. 열만 있고 물이 없는 사막이 됩니다.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성취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미 심판받은 상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해체하십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성숙한 내가 되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나’라는 주체가 중심에서 내려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선악 판단의 주체 자리에서 해고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바로 지옥이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생명이라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십니다. 집, 관계, 성취, 자존심, 명예… 이 모든 것이 떠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 이것들이 내 생명이 아니었구나.” “예수만이 내 생명이었구나.” 이 깨달음이 영생의 시작인 것입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은 결국 한 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획이 결국 한 분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그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의 가장 작은 점 하나도 예수를 빼고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놓치고 율법을 붙드는 것은 율법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붙들면 율법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복음이 됩니다.
빛은 우리가 아닙니다. 빛은 우리 안에 오신 분입니다. 착한 행실은 우리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행하신 일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책이 아닙니다. 예수로 완성되기 위해 주어진 증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애써 빛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안에 계신 빛을 숨기지 않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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