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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산상수훈 - 산상수훈과 간음의 참된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5.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27~32 )

어느 날 한 남자가 오래된 지도를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지도에는 분명히 정상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었고, 그는 그 선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도를 가장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 정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습니다. 지도를 흘낏흘낏 보며 대충 걷던 사람이 오히려 정상에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지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도를 읽는 눈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펼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으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이성에게 불필요한 시선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겨누고 계신 과녁은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우리의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빠져나오던 시절, 그 광활한 사막 어딘가에는 일반 백성이 읽고 쓸 수 있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문자는 신전의 것이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왕과 신 사이의 언어로만 존재하던 기호 체계였습니다. 글은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것이었지, 신이 인간에게 내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내 산에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돌판에 글을 쓰셨습니다.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글을 올리는 것이 고대 종교의 공리였는데, 신이 인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글을 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근본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공로로 신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성육신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문자를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즉각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십 일 동안 산 위에 붙들어 두시고, 직접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문자를 아는 것과 그 안의 진리를 아는 것 사이에 사십 일의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이 해독하는 암호가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사람 안으로 뚫고 들어올 때 비로소 전달되는 무언가였던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말씀'을 가리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로고스' '레마'입니다. 로고스는 그릇이고, 레마는 그 안에 담긴 진리입니다. 로고스는 진리를 가리키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유리잔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리잔은 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유리잔이 아니라 그 안의 물입니다. 우리가 유리잔을 핥는다고 목이 시원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성경이라는 그릇을 핥으면서 그것이 갈증을 해소해 줄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법조문을 암기하고, 절기를 지키고, 규범을 철저히 따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이라 부릅니다. 왜 하필 로고스인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레마, 곧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은 육신이라는 그릇, 로고스라는 표피를 입고 오셨습니다. 눈이 열린 자들은 그 표피 안에서 레마를 보았습니다. 눈이 닫힌 자들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는 껍질만 보았습니다. 동일한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메시아를 경배하고, 어떤 이들은 신성모독자라고 돌을 들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간음은
'나아프'입니다. 이 단어를 구성하는 세 자음, '눈, 알렙, 페' 품고 있는 원초적 의미는 각각 '아래', '하나님', '입'입니다. 풀어 말하면, "아래에서 유통되는 하나님의 입의 말." 위에서 내려온 말씀이 아래의 방식으로 가공되어 통용되는 것, 그것이 간음의 뿌리에 담긴 의미입니다.

옛 성전, 지상의 성전에서 거래되던 언어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 인간의 이성과 상식과 도덕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독하려는 것, 사전을 들고 하나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것이 진짜 읽기라고 착각하는 것, 이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성적 일탈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말씀을 인간의 방식으로 읽지 말라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십계명 자체가 인간에게 내려주신 레마인데, 그 레마를 로고스로, 법조문으로 읽는 순간 계명은 이미 위반됩니다. 지키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간음이 되는 역설인 것입니다.

그 역설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온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그들의 편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그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레위기는 분명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근거해 있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씩,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자리를 떴습니다.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도 던지지 못했습니다.

그 침묵이 선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그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른다고 자처했던 그들이야말로 간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돌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말씀을 로고스로, 심판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간음이고, 그것이 살인인 것입니다. 간음과 살인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두 가지 열매였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 이 구절의 '음욕'은 헬라어로 '에피뚜미아'입니다. '에피'는 강조이고, '뚜미아'는 희생제사입니다. 음욕의 어원이 희생제사라는 사실은 처음 들으면 낯설지만, 뿌리를 따라가면 소름이 돋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에게는 뿌리 깊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겠다는 충동, 내 열심으로, 내 헌신으로, 내 도덕성으로 신의 시선을 얻겠다는 욕망, 이것이
'에피뚜미아', 음욕의 본질입니다. 자기 힘으로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말씀은, 율법주의의 안경으로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분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고 내 방식으로 따르려는 욕망을 품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창녀와 앉아 계신 것을 보고 '저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것, 안식일에 밀을 비벼 드시는 것을 보고 '율법 위반 아닌가'라고 계산하는 것, 그 시선 자체가 음욕이고, 그 계산 자체가 간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1절에는 이혼 증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세페르 케르투드', 직역하면 "갈라서게 만드는 책"입니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편지를 매일 읽습니다. 편지에는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함께 살아갈 미래가 얼마나 아름다울지가 써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편지를 규칙집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오늘은 일찍 일어나라'고 썼다면, 그것을 '아침 6시 기상 의무'로 이해합니다. '내가 없을 때도 잘 먹어라'는 말을 '하루 세 끼 균형 잡힌 식사 규정'으로 적어 둡니다. 편지는 점점 법조문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법을 지키느라 남편과 완전히 멀어집니다. 편지를 읽을수록, 남편과 이혼하게 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편지가, 열심히 지켜야 할 규정집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이혼증서가 됩니다. 같은 성경, 같은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혼인 언약 증서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이혼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성경은 어느 쪽입니까?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내 말(레마)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않는다." 레마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행위로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레마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로고스)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말씀을 로고스로만, 법으로만 이해한 사람들은 평생 성경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주일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헌금을 성실히 드렸으며, 이웃에게 친절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 그 로고스가 마지막 날 그들을 심판하는 증거로 세워집니다.

성경을 가장 열심히 지킨 사람이 성경에 의해 심판받는 역설은 공포 이야기가 아닙니다. 방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걷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미 내게 걸어오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그 앞에 서 있는가.

예수님은 성전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사람들은 그것이 헤롯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세운 첫 번째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스룹바벨이 세우고 헤롯이 증축한 두 번째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성전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돌로 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었고, 더 나아가 그 예수를 품은 사람들인 성도들 자신이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두 번째 성전의 시대에 그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의 시대, 지금 이 시대에 말씀은 사람의 심장에 새겨집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성전인 돌로 된 건물, 규범과 의식으로 유지되는 종교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신랑은 이미 세 번째 성전을 일으키셨는데, 아직도 두 번째 성전의 예배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려 하는 것은 예수께서 산 위에서 향해 말씀하신, 간음하는 여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
"화로다 나여"라고 외쳤습니다. 욥은 긴 변론 끝에 "이제 입을 닫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를 깊이 알아갈수록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레마를 받은 자는 말이 줄어듭니다. 자기 교회 자랑이 사라지고, 자기 신앙 경력 자랑이 사라지고, 자기 헌신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입을 여는 순간 레마는 로고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랑이 자랑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더 열심히 살라는 강령이 아닙니다. 율법주의라는 옛 성전을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시내 산 위에서 돌판에 새겨진 계명이, 신약의 시온 산 위에서 새롭게 선포되어 그 계명을 법으로 읽는 모든 방식을 뒤집어엎습니다. 간디가 산상수훈을 읽고 위대한 윤리 강령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윤리 선생으로 산에 오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러 오신 신랑으로서 그 산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율법으로, 옛 성전의 방식으로 나를 만나려 하는 한, 그대는 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간음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신랑은 오직 한 가지 이유로만 신부를 떠납니다. 음행의 말, 곧 말씀의 곡해, 그 외에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다만 잠잠히 서 있으면 됩니다. 무언가를 해서 그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 오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그 앞에서 손을 내려놓는 것이 산상수훈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전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