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 5:27~32)
어떤 나무꾼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나무를 베었습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허리가 굽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지런한 사람이라 불렀고, 그 자신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문득 자신이 나무를 베는 것은 숲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도끼질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손에서 이미 무언가가 떠나 있었습니다. 올바른 행동처럼 보이는 것 안에 전혀 다른 욕망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간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바로 이 지점으로 데려가십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은 흔히 성적 충동에 대한 경고로 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훨씬 깊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분이 가리키시는 것은 행동으로 터져 나오기 이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에서 작동하는 어떤 근원적인 방향성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나쁜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뿌리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죄는 본래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화살이 아무리 힘차게 날아가도 과녁을 벗어나면 그만이듯, 아무리 선해 보이는 노력이라도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목표를 잃은 것입니다.
율법은 이 빗나감을 바로잡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과녁을 벗어나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하시려는 일은 점수를 매겨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재가 얼마나 깊이 비틀려 있는지를 직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 탐심조차 죄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는 제품이 아니라 토양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남자'는 말씀(씨)을 가진 자, 곧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며, '여자'는 그 씨를 받아야만 비로소 생명을 가질 수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는 것은, 인간이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깨지는 것이 이혼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 밖에서 다른 것을 통해 자신을 채우고 완성하려는 시도가 간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의 진의는 민법적 혼인 제도를 수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분은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언어로 풀어 주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여기서 '아무것도'는 세상적 활동의 불가능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맺는 일의 불가능을 뜻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여전히 가지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죽어 가는 땔감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책망이 나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이세벨은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이세벨'을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잘못된 교사, 이단적 지도자, 타락한 종교 지도자, 그러나 본문이 가리키는 방향은 안쪽입니다.
인간은 어떤 지식이나 진리를 접해도 곧 '나'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기 색깔로 굴절시킵니다. 복음을 들어도, 십자가를 배워도, 그것이 나의 성장과 자랑과 증명의 재료로 전용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속삭이는 스승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도 할 수 있어. 이 복음으로 힘을 얻어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돼." 이것이 이세벨의 목소리입니다.
역사적 이세벨 왕비는 아합 왕과 결혼하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이스라엘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에게 다른 사랑의 대상을 소개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세벨도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끝에 "그러니 너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먹이는 척하면서 실은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7장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요한을 광야로 데려가셨는데, 거기서 요한이 본 것은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이름은 큰 바벨론, 음녀들의 어미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계시록 12장에 이미 등장한 곳입니다. 아들을 낳은 여자인 교회가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에서 양육을 받는 바로 그 광야입니다. 다시 말해, 양육받고 있는 교회의 내면 풍경이 저 짐승을 탄 음녀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입니다. 짐승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앞에서 자신의 힘과 공로를 증명하고 자랑하려는 세력입니다.
스가랴서는 이를 '큰 산'이라 부르며, 그 산이 은혜를 가로막는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23장은 같은 진실을 오홀라와 오홀리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이스라엘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 대신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을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그 강대국들의 힘을 흠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섬기는 척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간음이라 불렀습니다. 그 구도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인정과 성취와 안전을 향해 달립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 짐승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짐승이 우리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계시록 17장 16~17절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이 그 짐승을 시켜 여자를 죽이십니다.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BC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했고, BC 586년 남유다가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이 흠모하고 의지하던 바로 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파멸시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리심의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에 율법의 기능이 겹쳐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입니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단 한 번의 실패로 전부가 무너지는 것이 율법의 셈법입니다. 그 앞에서 인간은 결국 손을 놓게 됩니다. 그 놓음이 바로 살리심의 시작인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절박한 여자였습니다. 씨를 이어야 할 남편들이 차례로 죽고, 시아버지 유다마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녀는 창녀로 위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오릅니다(마 1:3). 성경이 이 이야기를 지우지 않고 보존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명이 이어질 수 없는 막힌 길목에서, 창녀의 자리로 들어간 자를 통해 씨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예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창녀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간음한 자들의 주홍글씨를 몸소 달고 율법의 심판 앞에 서셨습니다. 유대주의의 율법주의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짐승에게 살이 뜯기듯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우리의 간음 기록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가 가리키는 방향은 "간음하지 마십시오"가 아닙니다. "당신이 간음한 자입니다"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그 창녀의 자리에 예수님이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그 진실 앞에 설 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 이세벨의 목소리가 비로소 잦아듭니다. 그것을 양육이라 하고, 자라남이라 하고, 성화라 합니다. 선해지려는 노력의 결과를 스스로 챙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의 끝에서 다시 십자가 앞에 손을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나무꾼은 결국 도끼를 내려놓았습니다. 나무를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 숲의 일부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뿌리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아무리 그럴싸한 모양을 유지해도 이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뿌리로부터 흐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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