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27~32)
어느 도시의 오래된 도서관에 사서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도서관의 장서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어떤 책이 몇 번째 서가 어느 자리에 꽂혀 있는지, 어느 저자가 어느 해에 무슨 책을 펴냈는지, 그는 모두 꿰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도서관을 지키며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책의 제목과 목차와 저자명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도서관에 한 낯선 이가 찾아와 책 한 권을 빌려 읽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 책이 제 이야기입니다." 사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 안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로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가장 열심히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의 출발점입니다.
히브리어 '나하프', 간음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의 자음을 풀면, '아래', '하나님', '입'이라는 세 의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곡해된 것, 아래 성전에서 통용되는 말, 그것이 간음입니다. 사전에는 '혼인을 파괴하다', '우상을 숭배하다'로 정의되어 있지만, 그 정의는 인간들이 나중에 합의하여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단어를 주실 때 담으신 의미는 그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그 단어가 처음 주어진 시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날 때, 그 시대에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없었습니다. 문자란 오직 신에게 드리는 제례 의식에서만 쓰이는 것이었고, 그것도 애굽에만 존재했습니다. 무역이 활발해진 페니키아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통용되는 문자가 생겼습니다. 히브리어는 그보다도 훨씬 뒤에 형성되었습니다.
왕족으로 자란 모세는 그 애굽의 제례 문자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내 산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글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신이 오히려 인간에게 글을 써서 내려준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신이 인간을 향해 내려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 글을 받은 모세가 그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례 문자는 일반인들이 읽고 해독하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십 일을 잡으시고 모세를 붙들어 두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십 일은 인간의 역사 전체를 상징하는 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평생을 통해 그 말씀의 진의를 설명해 가십니다. 처음에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었고 띄어쓰기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눈으로 읽고 인간의 지성으로 해석하도록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을 구조 자체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입에 문 채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된 인간이 성경을 읽으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곡해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행위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말씀을 가리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로고스는 진리를 담은 그릇입니다. 레마는 그 그릇 안에 담긴 진리 자체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예수라는 진리를 만나고, 어떤 사람은 지켜야 할 규칙들의 목록만 봅니다. 전자는 레마로 읽는 것이고 후자는 로고스에 머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오래전 세상을 떠난 딸에게 편지를 써두었다고 합시다. 딸이 자라 그 편지를 읽을 때, 어떤 이는 그 편지에서 어머니의 손길과 목소리와 사랑을 읽습니다. 그에게 그 편지는 어머니 자체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그 편지에서 철자법을 분석하고 문장 구조를 따지고 어휘 수준을 평가합니다. 그에게 그 편지는 언어학 연구 자료에 불과합니다. 같은 편지를 읽었지만, 한 사람은 어머니를 만났고 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유하여 능력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이 로고스의 수준에서 인간의 행위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살려내는 능력으로 역사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요 12:44). 이 말씀에서 나를 믿는 것이 나를 믿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 즉 로고스의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본받아야 할 롤모델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파괴되어야 할 두 번째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여기서 '사흘'이라고 번역된 어구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이신 예수께서 파괴되시고, 성도를 품은 세 번째 성전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성전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가 나이고 내가 예수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대우하시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던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안식일을 어기고, 창녀들과 포도주를 나누고, 성전을 뒤엎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는 불경하고 방종하고 위험한 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음녀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타인에게서 어떤 오점이나 실수를 발견했을 때,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정죄하고 잡아 죽이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리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주목해 온 인간 보편의 속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감추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그것을 잡아 죽임으로써 자신의 실체를 은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게 선교사가 거울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족장의 아내는 난생처음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얼굴이 너무 충격적이었던지, 그녀는 거울을 박살내 버렸습니다. 거울을 깨버리면 자신의 추악함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감추어 놓은 실체를 드러내는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리새인 나쁜 놈들' 편에 섭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라는 고백 없이 복음 앞에 서게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내 안에도 율법이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그 짐승 위에 앉아 예수를 음녀로 보는 눈이 내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어른이 나귀 새끼를 타면 발이 땅에 닿습니다. 왜 하필 그것을 타셨을까요?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가장 무용한 것, 그것이 바로 없음의 자리에서 마귀의 행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아담인, 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타고 그렇게 들어가신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을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마음을 품는 남자를 경계하는 구절로 읽는다면, 성경을 표피적 문자로 읽는 것입니다. '음욕'으로 번역된 '에피뚜미아'는 '에피'와 '두메오'의 합성어입니다. '두메오'는 희생제사를 드린다는 뜻이고, 거기서 탐심과 욕망을 뜻하는 '두모스'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음욕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자기 힘으로 열심히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리고자 하는 것, 그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근본적인 탐심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고,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려 하고, 자신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는 욕망이 음욕입니다.
어떤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까지 모두 참석했습니다. 십일조를 어김없이 드리고, 전도지를 나누었으며, 봉사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는 동안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작동하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정도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시겠지. 이 정도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지.' 그것이 음욕입니다.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쌓으려는 욕망, 그 욕망의 눈으로 예수를 보면, 예수는 반드시 음녀로 보입니다. 율법의 기준에서 한참 못 미치는 초라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래서 정죄합니다.
마태복음 5장 31절의 이혼증서 이야기는 단순한 결혼법 규정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세페르 케르투드'는 '이혼하는 책', '갈라서게 만드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 더 나아가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같은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혼증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인 언약서가 됩니다.
봄날 오후에 한 연인이 처음으로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고 합시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그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 편지를 읽으며 그 봄날의 설렘과 그 사람의 목소리와 처음 마음을 다시 만납니다. 그 편지는 그들의 사랑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다른 사람에게 그 편지는 어떻게 읽힐까요? 그때 왜 이런 약속을 했을까, 이 약속이 나를 지금 이렇게 묶고 있구나, 그에게 그 편지는 질곡이고 족쇄이며, 결국 이 관계를 끝내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증서가 됩니다.
말씀을 로고스로만 읽는 사람에게 성경은 이혼증서입니다. 그것은 그를 예수라는 신랑에게서 갈라서게 합니다.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이 된 성경은, 그 사람을 예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책이 됩니다. 반면 말씀이 레마로 주어진 사람에게 성경은 혼인 언약서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흙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내가 보냈다." 그 선언이 자신을 죽이고 신랑 안으로 함몰시켜 내는 사랑의 언약이 됩니다.
32절의 "음행한 연고 없이"는 헬라어로 '로고 포르네이야스'입니다. 행음케 하는 말, 즉 말씀을 곡해하여 인간 중심의 법으로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신부인 성도는 절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무서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신랑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간음케 하는 말, 즉 말씀의 곡해이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산상수훈을 매일 읽었습니다. 법정 스님도 그랬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산상수훈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도덕적 이상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문서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산상수훈은 위대한 윤리 강령으로 읽힙니다. 그것이 로고스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입을 여셨을 때, 그것은 더 높은 도덕 기준을 제시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내 산의 율법을 시온 산에서 무너뜨리러 오신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구조 자체가 선언입니다. 옛 성전의 이해를 새 성전이 부수는 것입니다.
오른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리고, 오른손이 실족케 하거든 찍어버리라는 말씀은, 신체 훼손을 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의와 자기 능력과 자기 열심이라도 십자가 앞에서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라면, 그것을 붙들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그것 없이 생명 안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이것은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로고스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그것을 레마로 받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는 순간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그리고 숯으로 자기 입술을 지졌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닫겠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받아 전할 때마다 "왜 나입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진리를 알면 알수록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다시 로고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많아지면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먼저 깨져야 합니다. 인터넷 카페에서 신학 논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옛 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음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랑의 은혜 안에 자유롭게 머물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를 칭찬하거나 채찍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의 우매함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는 율법을 더 열심히 지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붙어 있음으로써 옵니다.
도서관의 사서는 결국 그 낯선 방문객에게 물었습니다. "그 책이 당신의 이야기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방문객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이 나입니다. 그가 죽고 살아난 것이 내 이야기입니다." 사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책의 모든 것을 알았지만, 그 안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은 끝내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내 이야기로 읽히는 자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내 이야기로 읽히지 않고, 내가 지켜야 할 수많은 계명의 목록으로만 보인다면, 그 성경은 이혼증서입니다. 당신에게 성경은 이혼증서입니까, 혼인 언약서입니까? 교회 자랑도, 나 자랑도 없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요한복음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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