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태복음 5:31~32)
인도 북부 룸비니의 숲속에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무화과과에 속하는 그 나무를 사람들은 보리수라 부릅니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싯다르타 고타마, 곧 석가모니가 그 나무 아래서 49일을 앉아 있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지금도 순례자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보리수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보리수의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합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열매인 척 매달려 있지만 안에 씨가 없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 저주를 받은 나무입니다. 석가모니가 그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전승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율법의 나무 아래에서 멈추었습니다. 거기까지가 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뷰파인더라는 말을 압니다. 카메라 뒤에 붙어 있는 작은 창, 피사체를 확인하는 그 눈구멍입니다. 그런데 렌즈에 먼지가 끼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사체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좋은 피사체 앞에 서 있어도, 뷰파인더가 더러우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성경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라보는 눈, 그 뷰파인더가 닦여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읽어도 그것은 도덕 교과서이거나 교훈집으로만 읽힙니다.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성경은 절대 진리로 읽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뷰파인더를 닦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금강경에는 봄(見)의 네 단계가 있습니다. 산을 보는 방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유명한 가르침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산시산 수시수 (山是山 水是水), 사물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봅니다. 성경의 '옵타노마이'입니다. 그런데 이 수준에 머물면,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에이돌론', 곧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낯선 신상(神像)만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나 개념을 원래의 내용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껍데기로만 파악하는 것,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산불시산 수불시수 (山不是山 水不是水), 산을 조목조목 뜯어보다가 "이게 다인가?"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데카르트가 이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성경의 '블렙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묻는 단계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산시수 수시산 (山是水 水是山), 산에 물이 있고 물에 산이 있음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사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는 오도(悟道)의 시작입니다.
네번째 단계는 다시, 산시산 수시수 (山是山 水是水), 모든 것이 진리 하나로 통해 있음을 알게 된 후,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산과 물이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보입니다. 성경의 '호라오', 내용을 꿰뚫어 보는 눈입니다. 이 수준에 이른 자는 현상계에 매이지 않습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진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 부르고, 불교는 해탈이라 부릅니다.
사물을 표피로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보면 그것이 곧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낯선 신상(神像)만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를 그 원래의 내용대로 보지 못하고 껍데기로만 파악하는 것,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율법을 율법 자체로만 보는 것, 십자가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예배를 의무 수행으로만 보는 것, 그것이 모두 우상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이런 말로 끝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산스크리트어로 풀면 이렇습니다. "건너가라, 건너가라, 저기에 진리가 있다. 건너가면 마하반야바라밀다, 절대 존재의 지혜로 극락에 이룰 수 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야 약속의 땅이 있다는 구약의 메시지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하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여러 갈래로 흘러 각 민족의 전통과 경전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석가모니는 브라만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흘러 내려온 아리안계 민족으로, 이미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창세 이야기와 율법의 전통 안에 있었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성경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멈추었습니다. "건너가라"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진리다, 건너오라"고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설법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언젠가 야소(耶蘇)가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이 쓸모가 없다." 그가 그 야소가 누구인지 알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심으셨고, 진리를 가진 자는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도교. 이 모든 종교의 경전은 구약에서 끝납니다. "너희가 해라"입니다. 선행, 고행, 봉사, 수도, 정진,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같습니다. 너희가 건너가라. 오직 기독교에만, 신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약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 힘으로는 건너갈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산에 오르셨습니다. 밤 사경까지 베테랑 어부들이 노를 저었지만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셨고,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영접하자마자 곧 땅에 이르렀습니다(요 6:21). 이것이 신약입니다. 가나안, 약속의 땅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도달하는 곳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건너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구약입니다. 건너간 자에게 다시 "건너가라"고 외치는 것은 역방향인 것입니다.
봄이 오면 벚꽃이 핍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집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빨리 지는가." 그러나 성도는 다르게 읽습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압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것은 버찌가 열리기 위한 조건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이 샤론의 꽃으로 오셨고, 그 꽃이 떨어지셨기에 우리에게 열매가 맺혔다는 것을 말입니다.
암술과 수술이 수정하면 씨방이 생기고, 씨방이 생기는 순간 꽃은 떨어집니다. 열매가 맺히는 증거가 꽃이 지는 것입니다.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인 예수 없이 열매인 척 매달려 있는 것이 죽어야, 거기에 말씀의 씨가 심기고 진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무화과나무는 흥미로운 나무입니다. 우리가 먹는 무화과 열매는 사실 열매가 아니라 꽃입니다. 그 안의 사각사각한 것이 수술머리입니다. 씨가 아닙니다. 그래서 배(胚)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꺾꽂이, 즉 삽목을 해야 번식합니다. 그냥 두면 지만 자랍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고 꽃인 채 매달려 열매인 척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 그림 때문입니다. 안에 말씀이라는 씨, 생명이라는 씨가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열매가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매달려 있어도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1, 5)
하나님이 제사를 명하신 것은 제사를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이 결국 같은 진리를 향한다는 것이 성경 읽기의 핵심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그것을 먹어야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방향과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선악 구조 안에서만 읽으면 성경은 영영 도덕 교과서로 남게 됩니다.
비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립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물은 쓰나미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 그것을 봄비를 보면서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호라오'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산 자의 표입니다.
스가랴서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사탄이 그 옆에서 참소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겨라. 내가 새 옷을 입혀주겠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입고 있던 옷을 대가 없이, 조건 없이, 그에게 입혀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조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인간이 열심히 만들어 입은 행위의 옷, 선행의 옷, 종교적 성취의 옷, 그것이 더러운 옷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옷은 벌거벗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에스겔 16장에서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행음하였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제사도 정성껏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간음이라고 부르십니다. 왜입니까? 신랑이 입혀준 옷을 벗어버리고 자기 옷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신의 행위로 서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분의 몸을 세마포로 감쌌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세마포를 무덤 안에 벗어두고 가셨습니다. 왜입니까? "이 옷을 너희가 입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옷을 벗어버리고 자꾸 자기 옷을 만들려 합니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많이 헌금하고, 더 자주 새벽기도를 나가면 더 나은 신앙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러운 옷입니다. 신랑에게 먹칠하는 행위입니다. 간음인 것입니다.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이 불평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비처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잇새에 씹히기도 전에 재앙이 임했습니다(민 11:33). 고기를 주고 왜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들이 원한 것이 단순한 고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먹던 유월절 어린양 고기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이미 건너온 자들이 다시 유월절로 돌아가려 한 것입니다. 예수를 다시 추억하고, 다시 섬기러 가려 한 것입니다.
성찬식이 두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찬식을 하면, 그것은 자꾸 예수를 먹는 행위가 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다시 잡는 행위가 됩니다. 이미 건너온 자가 다시 건너가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고기 가마를 추억하며 애굽을 그리워한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제사장의 뜰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보셨습니다. 그 눈빛은 꾸짖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야 네가 산다. 율법인 나를, 섬김의 대상인 나를 부정해야, 네가 진리와 연합한 나를 만날 수 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에 대답했다. "주님, 주님이 아십니다." 그것이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가서 내 양을 먹여라." 건너간 자는 이제 섬기러 갑니다. 섬김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건너간 자'의 히브리어가 '이브리'입니다. 히브리인입니다. 교회는 히브리인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낸 자들입니다. 홍해는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지 않으려 했습니다. 혼자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씨름 끝에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너갔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지팡이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자로 만들어서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셨습니다. '건너간 자'는 동시에 '저는 자'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자, 오직 말씀이라는 지팡이에 의지해서만 걸어가는 자, 그가 교회입니다. 그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난한 자, 저는 자, 건너간 자입니다.
그 건너간 자들이 홍해를 건넌 직후에 무엇을 했습니까? 출애굽기 15장은 잔치를 기록합니다. 미리암이 소고를 잡고 나와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율법의 종으로 다시 묶이러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미 풀려난 자가 그 자유를 누리며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예배 후에 자유가 없다면, 그 예배는 야단맞고 간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랑이 없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5장 31~32절이 말하는 간음이란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이 단어의 무게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간음은 신랑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신랑이 입혀준 옷을 벗고 자기 옷을 만들어 입는 것입니다. 신랑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신의 행위로 서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붉은 짐승을 탄 음녀를 기억하십시오. 어린양이 그 짐승을 타고 계십니다. 그런데 붉은 짐승은 율법 아래 있는 아담, 곧 우리의 눈에는 그분이 음녀로 보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계속 부정한 자로, 십자가에 계속 매달아야 할 존재로 봅니다. 그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나귀의 히브리어 파자(破字)는 '붉은 짐승'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붉은 죄인을 타고 십자가로 향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 나귀는 양 때문에 삽니다. 어린양이 대신 죽고 붉은 짐승이 사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나는 삽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계속 추억하며 다시 그분을 죽이려 하는 것, 그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여, 그 연합은 누구도 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빌릴 것도 없고 갚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벗고 자기 옷을 만들려는 순간, 그것이 떠나는 것입니다. 신랑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인 건너가자, 건너가자는 이미 건너온 자에게는 역방향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가는 길입니다.
봄비가 위에서 아래로 내립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벚꽃이 열매가 맺히기 위해 집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비를 보면서, 그 꽃잎을 보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자, 그가 '호라오'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산 자의 표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건너온 자답게 자유하십시오.
'신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산상수훈 - 옛 성전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그대가 간음하는 여자이다 (1) | 2026.03.19 |
|---|---|
| 산상수훈 - 내가 음녀 이세벨이며 내가 음녀 바벨론입니다 (0) | 2026.03.10 |
| 산상수훈 - 간음한 자의 자화상 (0) | 2026.03.04 |
| 산상수훈 - 산상수훈과 간음의 참된 의미 (0) | 2026.02.25 |
| 산상수훈 - 더 이상 도륙하지 말라, 완성된 것을 완성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0) | 2026.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