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1~14)
상상해보십시오. 서로를 개라고 여기던 두 사람이 어느 날 한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합니다. 한쪽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율법을 자랑하며 상대를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라 조롱했고, 다른 쪽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후예답게 상대를 "야만인"이라 멸시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그들 사이에는 견고한 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함께 무릎 꿇고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요? 철학도 아니었고, 율법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피가 중간의 막힌 담을 허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기적을 증명합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던 그가 이방인들에게 형제라 부르며 편지를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실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흩어졌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묘한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었고", "너희도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평소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철저히 부정하던 그가 왜 굳이 '우리'와 '너희'를 구분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분이 사라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너희도"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 이제 우리 모두가 '우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으로 자부하던 유대인과 학식으로 자랑하던 헬라인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기독교 윤리를 세상에 전파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가르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에게 고양이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것만큼 헛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기대하는 것은 외식을 조장하거나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먼저 새로 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행동을 바꿔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해야 행동이 바뀝니다.
아프리카에 스프링복스라는 양떼가 있습니다. 먹이를 찾아 이동할 때 뒤의 양들이 앞의 양들을 밀어붙입니다. 앞선 양들이 먹이를 다 먹을까 봐 걱정되어서입니다. 그렇게 서로 밀고 밀리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달리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뛰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러다 절벽을 만나면 앞선 양도 뒤따르는 양도 모두 떨어져 죽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밀어붙이며 무조건 달리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변할까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같은 상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롬 8:17)
읽어도 믿기지 않는 말씀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천사들과 세상을 판단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 걸고 쟁취하려는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이미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는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과거 시제입니다. 이미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 나라가 가시적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지금 이 땅에서 그 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가 답을 줍니다. 주님은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다." 양들은 놀랍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형제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우리 옆의 형제자매들입니다. 형제자매를 돌보는 것은 천국 가는 조건이 아닙니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된 자들의 당연한 삶의 모습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나를 위해 남을 밟는 자들이 사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예수님을 닮은 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누가 더 많이 가졌나, 누가 더 잘생겼나, 누가 더 똑똑한가"로 서열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섬기며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 천국을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많이 손해 보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렙돈은 유대인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8분의 1센트 정도의 가치입니다. 거의 쓸모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웁니까? 액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희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 이 가엾은 여인에게 그냥 가지고 가서 빵이나 사 먹으라고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투자해서 복을 받아내는 거래가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드려서 하늘나라의 분깃을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한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는 자선 단체를 만들었고, 내 굶주림을 논의했다.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는 기도실로 가서 나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헐벗었을 때 너는 내 몸가짐의 도덕성을 거론했다. 내가 아팠을 때 너는 네 건강함을 감사했다. 내가 집이 없을 때 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의 피난처라고 설교했다. 내가 외로울 때 너는 나를 혼자 두고 가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 너는 참으로 거룩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배고프고 외롭고 춥다. 너의 기도는 어디로 간 것인가?"
따끔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옆 사람의 아픔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룻기를 보십시오. 과부 둘이 베들레헴에서 이삭을 주우며 거지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를 축복하고, 종들이 상전을 축복하고, 상전들이 종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축복 기원을 따라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펼쳐보십시오. 예수님도, 사도들도, 모든 신앙의 선배들도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행19:8)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행28:30~31)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재통일된, 나를 희생해서 남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삶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살다 가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봐라,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우리는 하나다." 이것이 세상이 복음을 보는 창입니다.
불가능해 보입니까?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늘의 분깃을, 하늘의 기업을 바라봅니다.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민족도, 학식도, 명예도, 열심도 이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모두 오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모두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통일시키고 조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고 통일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렇게 한 번 살아봅시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한 곳을 바라보는 자들답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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