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세기 3:8)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기 시작했습니다. 에덴동산의 고요한 아침,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지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절절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오늘도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숨고 있는가?
인간의 영적인 파탄은 하나님을 기쁨 아닌 공포로 인식하게 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의 첫 결과는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걷지 못했습니다. 죄는 본능적으로 우리를 숨게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하고, 교회를 피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인간은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혼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음성은 정죄가 아니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호명입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의 파탄은 자기중심적 인식의 시작이 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창 3:7) 이 눈의 밝아짐은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중심의 인식에서 자기 중심의 인식으로 바뀐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자기 잣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 수치심’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선해 보이려는 모든 시도는 ‘무화과나무 잎’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열심과 수고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 안에는 여전히 자기 보호, 자기 가림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든 위장된 의를 벗기시고, 가죽옷, 곧 은혜의 옷으로 입히시길 원하십니다.
인간의 심리적 파탄은 두려움과 불안의 내면화를 합니다. 아담이 고백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두려움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방어적이게 만듭니다. 심리적 불안, 과민한 자존감, 끊임없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은 모두 죄 이후에 내재화된 인간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요일 4:18). 십자가에서 나타난 완전한 사랑은 우리를 다시금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 안기게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파탄은 책임 전가와 관계의 붕괴를 가져옵니다. 아담은 하와를 ‘이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의 아내, 돕는 배필이자 하나 된 존재를 외부인처럼 지칭하며 비난합니다. 관계는 단절되고,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은 죄의 언어인 ‘책임 전가’로 대체됩니다.
오늘날도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모두가 이 죄의 유산을 답습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정죄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공동체 회복의 소망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함께 살도록 부르신 자’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관계 회복은 가능하며, 교회는 그 회복의 모델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적 파탄은 고통과 죽음의 현실이 됩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남자에게는 땀 흘려야 먹는 노동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선언 속에 죽음이 선포됩니다. 육체는 더 이상 영원성을 담보하지 못하며, 고통과 쇠약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합니다.“죽음을 삼키고 이긴 생명이 있다.” (고전 15:5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적 파탄을 넘어서는 새 생명의 소망입니다.
인간의 환경적 파탄은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불러옵니다.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 3:17) 죄는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창조질서 전체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자연을 정복이 아닌 수탈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기후 위기, 생태계 붕괴, 자원 고갈이 모든 것은 타락의 연장이자, 인간의 탐욕이 낳은 산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포함합니다(롬 8:19~22).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인간과 자연은 다시금 조화로운 관계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는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죄로 인해 스스로를 덮으려는 인간의 무화과나무 잎을 벗기시고, 희생의 대가로 얻은 가죽옷,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히십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설 수 있습니다(히 4:16).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공동체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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