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오후였습니다. 경상도 어느 단칸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중학생 아들과 함께 살다 보니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오자 부부의 마음속에 슬며시 봄기운 같은 것이 돋아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옆 동네 가서 못이랑 망치 좀 빌려 오너라."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참 뒤, 창문 너머로 내다보니 아들이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놀라 물었습니다. "니, 안 가고 거서 뭐 하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비도 보슬보슬 오는디, 그 집이라고 그 생각 안 나겠습니까."
이 우스갯소리 하나가 성(性)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이미 다 하고 있습리다. 성적 욕망은 특별히 불경스럽거나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닙니다. 비 오는 날 오후, 열다섯 살 아이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입니다. 먹고 자는 일처럼,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새겨넣으신 생명의 리듬입니다.
결혼한 지 3년 된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꽤 유능한 편이었습니다. 기획안도 잘 쓰고, 후배들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월요일 아침마다 출근길이 유난히 무거웠습니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발걸음이 납덩이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주말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내가 살갑게 안아주며 "오늘도 잘 다녀와요"라고 말했던 월요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날은 발걸음이 달랐습니다. 어깨가 펴졌습니다. 커피도 더 맛있었습니다.
침실은 부부의 날씨입니다. 만족스러운 하룻밤은 다음 날 아침을 바꿔놓습니다. 남편의 출근길을 가볍게 하고, 아내의 하루에 이유 없는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반대로 침실에서 쌓인 서운함은 밥상머리까지 따라옵니다. 별것 아닌 말에 짜증이 튀어나오고, 이유를 모른 채 배우자에게 날을 세우게 됩니다. 배우자가 왠지 모르게 자꾸 투덜거린다면, 혹은 요즘 들어 괜히 시무룩해 보인다면, 부부의 침실 온도를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는 성을 얻기 위해 사랑을 주고, 여자는 사랑을 받기 위해 성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뜻 남자를 본능적 존재로 묘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남자도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다만 그 통로가 여자와 다를 뿐입니다.
한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왜 말로 표현을 안 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남편은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줄 때 알아요." 이 부부는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에게 성적 친밀감은 단순한 쾌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받아들인다"는 확인이고, "나는 당신에게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존재 확인입니다. 이 욕구가 지속적으로 거부당할 때, 남자는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 7:3). 의무라는 단어가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책임과 배려의 다른 이름입니다. 배우자의 몸과 마음을 책임지겠다는 언약의 언어입니다.
결혼 5년 차 아내 지영 씨는 남편과 크게 다퉜습니다. 남편이 약속을 어겼고, 아내의 말을 무시했으며, 사과도 성의 없이 했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채 밤이 됐습니다.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왔습니다. 아내는 등을 돌렸습니다. "피곤해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다니.' 그 거부는 일종의 복수였습니다. 당연한 감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패턴이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요? 지영 씨의 거부가 남편에게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자존심의 상처로 쌓입니다. 말로 풀지 못한 감정이 침실에서 문을 닫게 됩니다. 그 문이 한 번, 두 번 닫힐수록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높아집니다. 성적 거부는 힘이 없는 쪽이 쥔 마지막 무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기는 상대만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나도, 우리도 다치게 됩니다.
결혼 초, 많은 신혼 아내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달려들어요. 저는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이런 말을 합니다. "요즘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모르겠어요. 예전하고 달라요." 남자는 냄비 같습니다. 순식간에 달궈집니다. 여자는 가마솥 같습니다. 천천히 오래 데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열이 아니라 다름입니다. 남자는 시각과 후각에 민감합니다. 여자는 청각과 촉각, 그리고 관계의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여자는 "오늘 예쁘다"는 말 한마디, 설거지를 먼저 해주는 손길,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눈빛에서 마음이 열립니다. 그 마음이 열린 다음에야 몸도 열립니다.
반대로 남자에게는 아내의 눈빛 하나, 먼저 다가오는 손길 하나가 긴 말보다 깊이 닿게 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사람이 같은 침실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화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럴 때 좋아", "그때는 좀 기다려줘"라는 솔직한 대화가 부부의 침실을 바꿉니다.
성생활의 만족은 침실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아침 식탁에서, 퇴근 후 현관에서, 아이 재우고 나서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통해야 몸도 통합니다. 한 부부 상담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부 사이에 성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저는 먼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웃은 게 언제였나요?'라고 물어봐요." 웃음이 사라진 곳에서는 친밀감도 사라집니다. 친밀감이 사라진 침실은 두 사람에게 각자의 방보다 외롭습니다.
마음의 침실을 가꾼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 핸드폰을 내려놓고 배우자의 눈을 보며 "오늘 어땠어?"라고 묻는 것, 고마운 마음을 참지 않고 말하는 것, 서운한 것을 쌓아두지 않고 부드럽게 꺼내는 것, 이런 작은 습관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열린 문이 부부의 침실로 이어집니다.
성은 절제될 때 아름답습니다.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꽃핍니다. 그 울타리 밖에서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공허함만 남깁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성의 영역까지 넘보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성, 관계 없는 쾌락이 상품처럼 팔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술도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며 함께 만들어가는 친밀감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성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쾌락만을 위한 선물이 아닙니다. 두 영혼이 몸을 통해 하나 됨을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소통의 언어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는 순간, 몸도 하나 됩니다. 그 하나 됨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부를 '한 몸'으로 만듭니다. 비 오는 날 오후, 그 단칸방 부부처럼 소박하고,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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