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수기 6:2, 8)
사람들은 흔히 “구별된 신앙”이라고 하면 특별해 보이는 삶을 떠올립니다. 남들과는 다른 선택, 더 엄격한 기준, 더 경건한 모습 말입니다. 술을 멀리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외적으로도 눈에 띄는 신앙의 표시를 갖추는 것입니다. 마치 나실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은 분명 그런 구별을 말합니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입에 대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며, 죽음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이는 단순한 금욕 규칙이 아니라 “나는 여호와께 속한 자입니다”라는 삶의 표식이었습니다. 나실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제도를 설명한 뒤, 곧바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가장 유명한 나실인,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구별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죽은 사자의 사체에서 꿀을 먹고, 기생의 집에 드나들고, 결국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카락을 잃게 됩니다. 나실인의 세 가지 규례를 하나도 지키지 못한 인물로 거룩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놀랍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답은 분명합니다. 삼손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삼손이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도, 블레셋도, 자기 자신도 모두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사사시대의 축소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십니다. 이것은 삼손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삼손 이야기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어머니,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여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회적으로 아무 힘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듣고, 가장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마노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인은 말합니다. “우리를 죽이시려 했다면 이런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이 장면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비춥니다. 신앙은 직분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름이 드러나느냐,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 안에 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너희가 나실인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 하였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나실인을 일으키셨고,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듣기 싫은 말은 막고, 구별된 삶을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해 줄 설교를 원합니다. 죄를 죄라 말하지 않는 말, 십자가 없는 위로, 회개 없는 은혜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현대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 참된 나실인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손처럼 잉태할 수 없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더 철저하게,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에게서 태어나십니다.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개입되지 않은 탄생입니다. 그분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사람들은 그를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피한 나실인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는 나실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 이것은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 서원을 완성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나실인의 서원, 율법의 요구, 선지자의 예언, 구약의 모든 그림자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엄격한 규례를 만들어야 하는가? 삼손처럼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하는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다 이루신 분 안에 삽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거룩은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분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구별됨이란, 세상보다 더 나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 고백 속에 사는 자, 그가 오늘의 참된 나실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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