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셨느니라”(로마서 9:13)
이 구절은 많은 사람에게 큰 혼란을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고백과 달리, 한 사람은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미워하셨다니요? 공정하지도, 인간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에서가 미움받은 이유는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미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미움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아무 선이나 악도 행하지 않았을 때에 이미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로마서 9:11~1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의 행위를 예견하여 그를 택하시거나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따라 “선택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입니다(롬 9:11).
하나님의 미움, 곧 배제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입니다. 에서는 미움받은 것이 아니라 공평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엡 2:3).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정확히 말하면,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 없는 대로 갚으신 것입니다.
진짜 놀라운 것은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야곱도 에서처럼 죄인이었고, 오히려 더 간사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바로 그것이 은혜입니다.
왜 야곱은 사랑받았나요? 야곱이 사랑받은 이유는 그의 이름처럼 ‘붙잡은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빼앗고, 자기 욕심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그는 드디어 진짜 자신을 마주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야곱입니다." 간사한 자, 속이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자기부인의 자리에서 그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그의 열심이나 기술이 아니라, 자기의 죄된 본성을 인정하고 은혜를 붙든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은혜를 붙든 자에게 임합니다.
“왜 에서는 미워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다른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왜 나는 사랑받았는가?” 우리는 야곱보다 나을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자기 아들의 피로, 자기 생명으로, 자기 영광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말입니다.
에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고, 야곱은 자기 이름을 포기한 자리에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자격을 주장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죄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에서와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야곱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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