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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유다의 이야기로 본 복음의 실체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28.

성경은 때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장면들을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38장은 그런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유다’,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 메시아가 나올 지파의 조상으로서, 복음의 혈통을 잇는 중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유다의 삶에 대해 거의 침묵하며, 유일하게 다말과의 불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하고 이상한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유다에게 장자의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유다를 축복하며 이렇게 예언합니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규(왕권)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신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창 49:9~10)

이 말은 유다의 자손에게서 왕이 나올 것이며, 궁극적으로 메시아, 신로(평강의 왕)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유다는 단지 한 부족의 족장이 아니라, 언약의 흐름을 이어갈 언약의 운반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이 복음을 그림자처럼 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유다의 생애는 다말과의 부끄러운 관계 말고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 단서입니다.

유다의 장자 엘은 다말과 결혼했으나, 악하여 죽었습니다. 당시의 고대 근동법인 시형제결혼법, 또는 형사취수제도에 따르면, 장자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차남이 그 아내와 결혼하여 장자를 대신한 후손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족 간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업, 곧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계승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언약의 핏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의무를 거절합니다.
‘내가 왜 내 자식들을 계속 희생시켜야 해?’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의 슬픔이었겠지만, 그 결정은 단지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유다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언약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보존을 택한 아담처럼, 유다도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말을 통해 복음을 보여주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이고 창녀처럼 위장하여, 유다에게서 씨를 잇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끄럽고 불의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언약의 끊어진 혈통을 다시 이으십니다. 복음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말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창녀가 되고, 오해받고 버림받아도 언약의 자손을 낳는 이 역할은, 신성을 버리고 인간의 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그림자입니다. 다말은 육체적으로 유다의 씨를 받았고, 예수는 죄인의 자리에 오셔서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다말의 수치는 바로 예수의 겸손이고, 다말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겁니다. 포도즙 틀처럼 자신을 밟히며 우리에게 열매가 되시는 그분은 겸손한 나귀처럼, 남의 짐을 대신 지고,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침묵하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십니다. 다말은 바로 그 예수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
장자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유다가 그 자리를 막아설 때, 다말이 들어가고, 이후 다윗이 나오고, 마침내 예수가 오십니다. 예수께서는 장자로서 완전한 죽음을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예수의 ‘
동생들’, 곧 우리에게 그 장자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인 자기 부인, 자기 비움, 자기 죽음을 이어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장자의 총회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교회가 시작된 자리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는 자들의 연합체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왜 자꾸 억울한 일을 겪고, 왜 손해를 보고, 왜 무너지고, 왜 세상에서 힘이 없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
부활’이라 부르십니다. 예수의 장자됨을 이어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은 이 맥락을 완성시켜 줍니다. 그들은 시형제결혼법을 인용하며 부활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죽은 자들은 산 자라는 것! 그 장자의 길을 따르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선언입니다.

결국, 참된 부활은,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처럼, 자기 부인하며 죽어가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귀처럼 살아가는 삶, 그 겸손과 자기 포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역사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통받고 부인당하고, 내 뜻이 꺾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복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실패자라 부르더라도, 하나님은 장자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라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