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 얼굴로 아는 믿음에서 십자가로 아는 믿음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라디아서 1:18~24)

사람은 누구나 믿음이란 단어를 들으면 먼저 이런 생각을 떠올립니다. “
나는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 “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믿음은 어느새 나의 결심, 나의 열심, 나의 실천을 점검하는 척도가 되어 버립니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기보다, 내가 관리하고 증명해야 할 능력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히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앙 이력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 있었고, 율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으며,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범적인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믿고 있다고 확신하던 바로 그 믿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무서운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믿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서도 자신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착각했던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
그래도 우리는 예수를 믿잖아요. 유대교와는 다르잖아요.”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내가 믿는 예수는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무너뜨리고 용서하신 그 예수입니까, 아니면 내 열심을 도와주는 종교적 도구로서의 예수인가요? 교회가 커지고, 사역이 많아지고, 선한 활동이 늘어나면 우리는 안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그러나 그 안에서 십자가의 용서가 점점 당연한 말로 밀려나고, 죄인으로서의 자리는 사라지고, 대신 자랑할 얼굴만 남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유대교적 믿음 안에 있는 셈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바울의 얼굴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과거와 현재를 기준 삼아 판단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사람을 얼굴로 알았다면, 판단은 갈렸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했을 것입니다. “
저 사람은 교회를 박해하던 자다. 사도 자격이 없다.” 또 어떤 이는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의 교회는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행적을 보지 않았고, 성과를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는 사실 하나만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가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외모와 이력, 태도와 성과를 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늘 이런 구분을 합니다. “
너는 안 되고, 나는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리고 그 중심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얼굴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신 자리에서 부르셨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이유는 그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감당하신 십자가의 용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말은, 그를 무조건 사용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택정과 부르심 사이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용서 없는 택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 여전히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설명할 때 언제나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꿉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복음을 전하게 된 일은 인간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멋진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용서만을 붙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보며 감탄해야 할 대상이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그렇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용서의 능력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서로를 십자가로 알기보다 얼굴로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과거, 현재, 성과를 보고 판단하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를 용서받은 자로 알고, 자신을 용서 없이는 설 수 없는 자로 압니다. 그래서 자랑은 사라지고, 비교는 무너지고, 오직 십자가만 남습니다. 그곳이 바로 복음의 현실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