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라디아서 1:15~17)
우리는 흔히 “구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감사와 결단의 이야기로 생각을 옮깁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니 이제는 주님을 위해 잘 살아야 한다.” 이 흐름은 너무 익숙해서, 거의 자동 반사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 익숙한 흐름과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구원 간증을 꺼내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이 붙들고 있는 모든 가능성과 근거를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이 말씀을 우리는 쉽게 ‘확실한 구원’, 혹은 ‘선택받은 사람의 안정감’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곧 이런 질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택정받지 못한 사람은 억울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신 것 아닌가?” 이 질문들은 얼핏 정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누가 선택받았는가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선택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은 오직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고백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함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열심도, 결단도, 종교적 성취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것도, 우리가 성도로 부름 받은 것도, 우리의 선택이나 반응을 고려한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택정과 은혜’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했고, 멸하려 했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유대교 전통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사도가 되기에는 최악의 이력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그 모든 일 이전에, 어머니의 태로부터 자신을 택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충격적입니다. 바울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택정된 것도 아니고, 선을 행했기 때문에 택정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선과 악은 모두 하나님의 택정과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 됨은 바울의 소관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도 됨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바울을 의심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사도일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의심은 곧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 역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오직 십자가로만 함께 묶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사실만이, 우리가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았다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함께 언급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붙드는 행함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행함뿐인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자랑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 앞에서 인간의 행함은 자연스럽게 무가치한 것으로 내려놓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택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 있는 인물로 빚어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삶이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그대로 두셨고, 그 상태에서 부르셨습니다. 이는 바울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후회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예수를 믿고자 마음을 바꿀 가능성조차 없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것은 오직 외부에서 개입한 하나님의 능력, 곧 택정과 은혜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에게서 믿음의 증거를 찾으려 합니다. 내가 느낀 감동, 내가 한 결단, 내가 경험한 변화, 그것이 있어야 내가 성도인 것 같고,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강렬한 체험을 사도 됨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속에서 아들이 일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경험을 증명하려는 말이 아니라, 자신 안에 어떤 가능성도 없었음을 고백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어둠입니다. 빛을 보아도 빛으로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이 어둠임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빛을 빛으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도 됨은 언제나 죄 가운데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두고, 나의 이름을 빛내고 싶어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의 일하심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택정과 은혜는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와 성도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선택으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내가 아니라 주가 자랑 되는 자리”로 부름 받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속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늘 우리를 다시 어리석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나에게 주가 일하셨다는 자리로 데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다 아는 이야기”로 지나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나를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 나의 실상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나타내신 주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은 나를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승리를 드러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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