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6~1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다른 복음”이란 단순히 내용이 조금 다른 복음, 율법을 조금 더하는 복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이며, 곧 복음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을 흐리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은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 선언은 단지 신약의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의 제시된 진리(시 14:1~3; 53:1~3)이기도 합니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어도, 복음을 가르치셨어도, 성령이 임하셨어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더러운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복음을 가르치신 목적이 인간을 착하게 만들거나, 성화의 모범생을 만들거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의인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 모순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만이 의인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인간의 행위를 의로움의 근거로 삼는 모든 생각을 처음부터 무너뜨립니다. 행함이 믿음의 증거라는 말, 성화를 의인의 증표로 삼는 말, 경건의 모양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다고 여기는 말은 복음의 뿌리를 흔드는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은 ‘내용이 다른 복음’이 아니라 ‘출처가 다른 복음’입니다. 겉으로는 바울과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해도 그 복음을 “누가” 전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바울은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단순히 율법을 섞은 가르침, 행위를 강조한 가르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인간을 높이는 모든 방식이 다른 복음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뛰어나서 깨달은 복음, 사람이 헌신하여 얻어낸 복음, 사람이 경건하여 붙잡은 복음, 사람이 충성하여 세운 사역, 사람이 영광을 받는 설교, 예배, 삶, 바울은 이것을 완전히 끊어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갈 1:10) 즉, 복음을 말하면서 ‘나’를 드러내는 것,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평가’를 구하는 것은 내용이 아무리 바르고 정통해도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조차 자신의 행함을 조금도 높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천사라도 저주받는다”고 말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높아지는 순간 복음은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도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깨달은 것도, 전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바울이 선을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조차 인간의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서 난 것이라면 벌써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 행위도 동일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설교하고, 복음을 전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선을 행할 수 없는 더러운 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려 하고,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위로를 얻고자 하며, 인정받으려 하고, 스스로를 뭔가 된 자로 여기고자 한다면 그것은 모두 다른 복음의 영역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이어도, 신학적으로 완벽해도, 교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도, ‘나’를 높이는 순간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복음은 내용만이 아니라 그 출처와 목적까지 온전히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끼어드는 순간 다른 복음입니다. 인간이 높아지는 순간 다른 복음입니다. 인간이 증명되는 순간 다른 복음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순간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은 선한 자를 부르는 말씀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는가? 아니면 은혜를 말하면서 나를 세우는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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