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 1:1~3)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흔히 놓치는 아주 중요한 점을 짚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 됨의 출처를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절)라고 축복합니다. 이 짧은 문장들 안에 담긴 핵심은,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오해하고 또 어떻게 참되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신학적·실천적 통찰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떠나지 못합니다. 삶의 선택과 행동의 바탕이 ‘나에게 유리한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종교생활도 쉽게 ‘나와의 거래’로 변질됩니다. “내가 이만큼 하면 은혜를 받겠다”, “나는 더 열심히 기도하니 축복을 달라”와 같은 사고는 결국 하나님과의 협상으로 귀결됩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지만, 속마음은 ‘하나님을 통해 나를 위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자기중심성’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은 들으면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얻는가?”를 묻습니다. 문제는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나의 소유’로서 은혜와 평강을 바라는 태도라는 점입니다. 즉, 은혜와 평강을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더 좋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다시금 자기 중심적 계산에 빠집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할 때, 그 말이 단순히 ‘교회가 화평하길’ 혹은 ‘삶이 편안하길’ 같은 의미라면 바울의 진심을 놓치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의 침투로 혼란한 상태였지만, 바울은 문제의 근본을 ‘사람의 기준’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출처’입니다. 사도 됨도, 은혜도, 평강도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에게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진술을 넘어 우리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재정립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내가 어떻게’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과 사랑, 그리고 부활로 연결된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의 윤리나 행위가 이 신분을 매매하거나 뒤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은 ‘나의 감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관계의 현실’입니다.
본문 설교는 롯의 아내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은혜와 평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원인임을 보여줍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세상(소돔과 고모라)을 좋아하고 미련을 품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윤리적 교훈을 넘어서, 우리가 무엇을 ‘축복’으로, 무엇을 ‘저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규정하신 축복과 저주는 우리의 감정적 평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면, 현재 하나님이 더하신 자비와 은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결국 은혜와 평강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과 세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내가 어떻게 하면’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을까’, ‘어떻게 하면 더 은혜를 받을까’ 하는 질문들이 반복될 때, 믿음은 다시 ‘나의 노력’으로 환원됩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시고 사랑으로 시작하셨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 시작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은 비교나 성취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와 평강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결관계’에서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삶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는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매일의 기도와 예배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하나님이 누구신가로 다시 세우십시오. 나의 감정과 상황보다 먼저 ‘주신 자리’를 묵상하십시오.
두번째는 뒤돌아보는 마음의 점검입니다. 어떤 것이 나의 애착인지, 무엇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솔직히 돌아보십시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세번째는 구원의 내막 묵상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을 자주 묵상하면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네번째는 교회 공동체의 기준 재정립입니다. 교회 내의 비교, 경쟁, ‘누가 더 잘 믿나’ 하는 문화가 있다면 복음의 출처(예수)로 다시 세우는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은혜와 평강은 ‘우리의 합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집니다.
바울이 축복할 때 말한 은혜와 평강은 우리의 기분 좋은 상태를 보장하는 문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주어진 연결이며, 우리의 정체성이 그 안에 놓여 있을 때 경험되는 평온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바깥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내면에서부터 안정과 평강이 흘러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주어진 관계 안에서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솔직해지는 것이 진정한 묵상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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